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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광장 함께 해방, 조연에서 주연으로② 물들고 물들이는 서로 돌봄

  • 이준기 장애인활동지원사
  • 등록일 2025-01-15
  • 조회수 39

이음광장

활동지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젤로(가명. ‘미켈란젤로’의 줄임말)가 어떤 사람인지 잘 파악하지 못했을 때부터 나는 젤로의 요리사였다. 뭘 먹고 싶냐고 개방형으로 질문하면 젤로는 항상 똑같은 것만 먹겠다고 대답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를 주재료 삼아 할 수 있고 좋아할 만한 요리 몇 가지를 나열하고 그중 고르는 음식을 만들곤 했다. ‘어떻게 해야 젤로가 감자튀김과 붕어빵, 라면 이외의 음식을 먹고 싶어 할까?’ 이때의 난 그런 사소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여러 요리를 시도하던 어느 날, 젤로가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방문을 열어젖히며 부엌으로 나오더니 내가 열심히 끓인 된장국을 싱크대에 들이부었다. ‘쪼르르’ 국물이 흐르는 소리에 이어 국물에 말아져 있던 밥알과 두부, 각종 채소가 ‘철퍽철퍽’ 떨어지는 소리에 말문이 막힌 사이 “맛없어서 안 먹어요”라는 젤로의 한마디가 내 폐부를 강하게 찔렀다. 된장국은 평소에 잘 먹던 메뉴여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평소보다 싱겁게 조리해서 그런 듯했다.

난 항상 내가 제안하기 전에 젤로가 먼저 선택해 주길 바랐다. 난 지원하는 사람이고 젤로는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영향을 미치기 전 젤로의 ‘순수한 의사’를 파악하는 것이 젤로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의구심이 들었다. 사과와 배 중 무엇을 먹고 싶은지 결정하려면 두 과일의 맛을 알아야 하듯이, 무언가를 잘 선택하려면 특정한 경험이나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경험과 지식이야말로 순수함을 가장 강력하게 오염시키지 않는가?

순수함은 좋고 오염은 나쁘다는 이분법적 도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어쩌면 세상에 순수한 의사결정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존재한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책이나 교육, 연설, 토론이 이처럼 중요하게 여겨질 일은 없을 테니. 의사결정 조력이란 타자의 순수한 의사를 파악하고 그것에 따르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의사결정에 필요한 경험과 지식을 제공하고 때로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는 상호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개입하나? 내가 너무 방관하나?’ 의사결정 조력이 필요한 사람과 지내본 적 있다면 누구나 해봤을 고민이다. 주변 사람들 눈치도 많이 보게 된다. ‘내가 젤로와 ○○하는 게 다른 사람에게 □□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가끔은 주변 사람들이 입도 떼기 전에 변명부터 늘어놓게 된다. 마치 그들은 관객이 되고 나는 주인공이라도 된 양 일련의 사고 과정을 일부러 방백처럼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해해 줄지도 몰라. 이게 나 혼자만의 결정은 아니었단 사실을.

젤로가 싱크대에 된장국을 쏟으며 함께 쏟아낸 감정은 라면을 먹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였을까? 라면을 먹고 싶다던 젤로에게 된장국을 먹어보자고 제안한 건 비윤리적이었을까? 뭐든 제안하면 ‘네’라고 쉽게 대답해 버리는 젤로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게 잘못이었을까? 가슴속에서 자꾸만 이런 질문이 자라나는데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 줄 사람이 없다. 질문이 자라난 자국이 아파서 젤로와 무대에 올랐고 이렇게 글도 써보고 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장애인활동지원사의 모습은 어떤 건가요? 이런 제 모습은 이상한가요? 여러분 가슴에도 질문의 자국이 있나요? 그 자국은 지금쯤 아물었나요? 아물긴 하나요? 확인하고 싶어요.

젤로가 원하는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내 일이다. 그런데 만약 그 활동이 젤로의 건강을 해치거나 안전을 위협한다면? 그때 장애인활동지원사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장애인활동지원사가 이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반문한다. ‘비장애인도 건강에 안 좋고 위험한 일 많이 하며 살지 않나? 왜 장애인은 그럴 수 없는가?’

물론 타당한 질문이지만, 내 생각에 그 질문은 이렇게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살균제 사용 결정,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세월호 탑승 결정, 지금도 어디선가 신음하고 있을 산재 노동자들의 노동하겠다는 결정, 그 의사결정은 정말로 자유로웠는가? 장애와 무관하게, 누군가의 의사결정이 완전히 순수할 수 있는가? 된장국을 싱크대에 쏟아버린 것처럼 이미 내려버린 결정을 뒤엎어야 할 때도 있지 않은가?

장애인도 비장애인만큼 자유로워야 한다는 건 자명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장애와 무관하게, 맥락에서 자유로운 의사결정은 없다. 그렇기에 비장애인도 장애인만큼이나 자유롭지 않다. 그렇게 생각해야 이것이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지금 우리에겐 인간을 넘어 폭력적인 구조 속에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사실상 박탈당한 모든 존재가 연결될 수 있는 그런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그 알아차림의 실마리는 내가 젤로를 돌보는 방식이 아니라, 젤로가 나를, 나아가 세상을 돌보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젤로의 돌봄은 순수성을 지키는 것보다 오염시키는 것에 가깝다. 천국도 국가도 소유도 없는 세상을 상상하고 노래한 존 레넌. 젤로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 삶을 실천하고 있다. 젤로는 공동체의 관습을 깨버리고 물질의 사유화를 거부하며 나를, 이 세상을 밝게 오염시킨다. 물드는 만큼 물들이는 돌봄.

내 가슴속을 비집고 나오던 질문의 자국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밝은 얼룩이 남았다. 젤로 덕이었다. 이젠 젤로와 함께 무대에 올라 그 아름다운 얼룩으로 더 넓은 세상을 물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나도 젤로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켜 보기로 했다.

“젤로, 나랑 공연할래?” 젤로의 마음을 오염시키기 위한 질문이었다.
“어.” 그 대답은 과연 젤로의 순수한 의사였을까?

  • (왼쪽) 된장찌개 재료인 대파, 양파, 배추, 청경채, 재래식 된장이 놓여 있다. (오른쪽) 조리대 위에서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즐겨 만들어 먹었던 된장찌개

이준기(석류)

장애인활동지원사, 마포의료사협 무지개의원 방문작업치료사. 병원에서 계약직 작업치료사로 일하다가 장애인의 몸을 교정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의료시스템에 환멸을 느껴 병원을 나왔다. 지금은 친구이자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 이용자인 ‘미켈란젤로’와 함께 동네 친구들을 만나고, 각종 마을 행사에 참여하고 지역 활동에 참여하면서, 불완전한 우리가 우리 모습 그대로 이 사회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배우고 있다.
otbeginner@gmail.com

사진 제공.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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