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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광장 예술창작 현장과 수어통역② 어딜 뺏겨,핀조명

  • 임동초 수어통역사
  • 등록일 2025-01-15
  • 조회수 20

이음광장

2017년부터 공연 수어통역을 하면서 타고난 끼인지 아니면 똘끼인지 모를 무언가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공연이 정확히 무엇인지, 내가 통역인인지 배우인지조차 모를 때가 있었다. 그래서 2019년에는 연기 학원에 등록해 연기가 무엇인지 배우며 배우, 문화예술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다.

수어는 시각 언어다. 눈으로 보는 언어라는 뜻이다. 따라서 화자, 즉 입으로 말하는 사람 옆에서 수어를 해야 비언어적인 태도나 뉘앙스를 보고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수어통역 자리는 화자와 가까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겨났고, 이는 연극 무대에까지 퍼졌다.

2023년, 또 다른 연극 수어통역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도 그림자 통역을 해야 했고, 연차가 낮은 배우들과 함께 연습을 진행했다. 배우 대부분은 수어통역사가 익숙하지 않았고, 이 공연이 데뷔작인 배우도 많았다. 장면 연습을 시작하며 배우들의 대사에 맞춰 통역 연습을 하는데, 연출이 한 배우에게 “네 뒤에 있는 수어통역사님 봐봐. 너보다 훨씬 리얼하게 잘하잖아”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그 배우는 언짢아하는 기색을 보였고, 그날 이후 나를 의식하는 듯했다.

두 번째 연습 날, 동선을 맞추기 위해 장면 연습을 하는데 그 배우는 나를 배려하지 않은 동선을 사용했다. 나는 쉬는 시간에 그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통역 공간을 확보해야 하니 동선을 정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아!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다시 연습을 시작하니 변함없이 동일하게 통역사를 배려하지 않은 동선을 사용했다.

나 역시 그림자 통역은 처음이었기에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 배우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한 달 가까이 알 수 없는 기싸움이 이어졌다. 드레스 리허설 당일, 조명감독님에게 “주인공보다 조도가 밝아야 수어가 잘 보이니 조도를 높여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배우는 연출을 향해 “배우보다 조도가 높은 게 말이 돼요?”라고 따져 물었다. 연출은 당황한 듯 “수어가 잘 보여야 하니까”라고 답했지만, 내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배리어프리 공연에서 자신만 돋보이길 원하는 배우와의 호흡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첫 공연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배우의 동선을 따라가며 숨 가쁘게 움직였다. 그는 자꾸 리허설에서 정했던 동선이 아닌 내 핀조명 쪽으로 들어와 연기하려 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라고 생각했지만, 무대 위에서 나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배운 연극은 ‘약속’이라고 했다. 약속을 어긴 배우로 인해 난 극중 인물의 대사 의미도, 감정도 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무대에 집중하지 못한 채 극은 마지막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공연이 끝난 뒤, 대기실로 돌아가며 그에게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기실에 도착하자 그가 다가와 “통역사님, 죄송해요! 제가 깜빡하고…”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그가 나를 놀리거나 연기하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짐을 싸고 공연장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누구의 잘못인지 고민하며 그를 원망하고 싶었지만, 나조차 그림자 통역을 잘 모르는데 그를 탓하는 건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두 달 동안 내가 느낀 것은 배우와의 기싸움도, 조명을 얻기 위한 싸움도 아니었다. 그것은 연극이라는 장르 안에서 어떻게 하면 농인 관객이 공연을 잘 보고 즐길 수 있을지 고민하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욕할 상대가 필요했을 뿐, 공연장에 있는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 그림자 수어통역을 처음 겪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연극에서 하나의 역할을 두 사람이 나눠서 무대 위에서 전달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농인 관객은 나를 통해 연극을 보고 느끼기에, 무대 위에서 나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수어통역사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 어두운 무대 한편에서 밝은 원형 조명이 필자를 비추고 있다. 여러 개의 박스가 놓인 무대는 붉은색 조명이 비추고 있고, 객석에는 빈 의자들이 놓여 있다.

    리허설 무대에서 핀조명을 받으며 수어통역 중인 필자

  • 무대는 전체가 환하고 검은 옷을 입은 세 사람이 나란히 서서 관객과 대면하고 있다. 가운데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고 왼쪽에 선 필자가 수어통역을 하고 있다.

    무대에서 수어통역을 하고 있는 필자

임동초

수어통역사. 지방 수어통역센터에서 일하면서 연극과 콘서트 등 다양한 무대에서 수어 통역을 통해 문화예술을 전달해왔다. 이 경험을 통해 문화예술과 장애예술인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주요 참여작으로 연극 〈당신을 초대합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제자리에서 정지한 상태로 180도 회전하기〉 〈어느마을〉, 뮤지컬 〈합체〉 〈푸른 나비의 숲〉, 콘서트 〈함께, INK 콘서트〉 등이 있다.
dlehan15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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