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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광장 예술창작 현장과 수어통역③ 연극이 끝나고 난 뒤

  • 임동초 수어통역사
  • 등록일 2025-02-12
  • 조회수 28

이음광장

수어통역사로 일한 지 12년이 되었다. 나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을 보내면서 느끼는 것은 소수의 직업군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의 무지에서 비롯된 무례함을 지나쳐서도 안 되고, 지나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문화예술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연출의 의도이다. 작품을 개인의 경험에 따라 해석할 수 있도록 한다는 연출의 의도 속에서 과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조건인가 하는 질문을 통해 공연의 접근성에 대해 고민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2023년 그림자 통역 형태로 참여한 뮤지컬의 막공(마지막 공연)이 끝난 뒤 회식 자리였다. 참고로 난 그 뮤지컬 공연을 하면서 연출부, 기획팀, 배우들과 엄청난 기싸움을 했고, 실제 고성이 오갈 정도였다.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난 후 책임 PD에게 가서 먼저 사과했다. 이것은 나의 행동에 대한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미흡함에 대한 사과였다.

“피디님, 제가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켜야 했어요.”
“이해해요. 통역사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덕분에 잘 마칠 수 있었어요. 한잔할까요?”

울컥하는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상대방은 나의 의도를 보고 있었다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보낸 3개월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운 좋게도 2023년에 연이어 모두예술극장에서 창작뮤지컬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전 작품 경험 덕분에 보다 편안한 상황에서 연습에 임할 수 있었다. 배우들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수어통역의 존재 이유, 조명의 사용, 배우와의 호흡 등에 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당연하다며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었고 같은 공간을 사용하면서 연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진행 과정에서 마찰은 여전히 존재했다. 나는 수어통역사 중 가장 경력이 오래되었다. 즉, 나의 행동이 배우에게 수어통역사의 표본이 된다는 의미다. 더욱 행동에 조심했고, 무대 위 수어통역사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 공연이 끝난 후 회식 자리에서 배우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먼저 사과했다.
“무례하다고 느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요! 전혀요. 그런데 혹시 말 놓아도 되나요? 선생님과 친해지고 싶어요.”

순간 당황했다. 나는 일을 하면서는 말을 놓지 않는다. 내가 지켜온 철칙과도 같다. 하지만 뮤지컬 공연을 하면서 나에게 보여준 호의와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준 배우들의 요청이었기에 흔쾌히 “좋아요!”라고 말했다. 공연에 함께한 수어통역팀은 나와 배우들이 평어 쓰는 모습을 보고 놀란 듯 눈이 커졌다.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수어통역사와 같은 공간을 쓰면서 어떤 부분이 힘들었고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면서 알게 되었다. 결국 각자가 가진 고민의 시선은 다르지만, 결론은 무대 위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잘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 순간 나는 각자 역할은 다르지만 우리는 동지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우연한 기회에 문화예술 수어통역 강의를 맡게 되었다. 강의 자료를 만들기 위해 같이 작품을 했던 배우에게 인터뷰 영상을 부탁했다. 나는 그가 보내온 영상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회식 자리에서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찍어서 보내줬기 때문이다.

“임동초 수어통역사님은 진짜 대단한 분이에요. 배우의 호흡, 동선, 눈 맞춤까지 디테일을 하나하나 다 살리려 하는 노력파라서. 사실 재능 있는 사람이 노력까지 하니 할 말이 없죠.”

너무 놀랐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노력을 알아주었다는 것이. 지난 추억이 다시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아직도 종종 배우들과 술자리를 가지고는 한다. 장애가 있는 배우든 장애가 없는 배우든 수어통역사든, 그냥 모여서 근황을 이야기하며 서로서로 응원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다. 진심이라면, 그리고 상대방도 최선이라면, 이제는 무지함에서 시작된 나의 이야기가 설득이 아닌 협력과 응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 역시 어느 분야에서는 무지하고 무례한 사람일 수 있음을…. 그래서 조금 더 친절하고 진심이어야 함을 배운다.

“무대 위 수어통역사님들을 응원합니다.”

  • 무대 왼편에 두 명의 배우가 마주보고 있고, 뒤에서 배우들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두 사람을 향해 한 팔을 내밀고 있다. 필자가 한 단 높은 곳에 서서 배우들과 같은 포즈로 수어통역을 하고 있다.
  • 컬러풀한 옷을 입은 배우들이 무대 앞쪽과 무대 뒤쪽 높은 단 위에 나란히 서 있다. 앞줄 한가운데에 필자가 서서 수어통역을 하고 있다.

공연 무대에서 수어통역을 하는 필자

임동초

수어통역사. 지방 수어통역센터에서 일하면서 연극과 콘서트 등 다양한 무대에서 수어 통역을 통해 문화예술을 전달해왔다. 이 경험을 통해 문화예술과 장애예술인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주요 참여작으로 연극 〈당신을 초대합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제자리에서 정지한 상태로 180도 회전하기〉 〈어느마을〉, 뮤지컬 〈합체〉 〈푸른 나비의 숲〉, 콘서트 〈함께, INK 콘서트〉 등이 있다.
dlehan15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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