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2022년 시작한 이음리뷰클럽은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구성원들이 창작자, 관계자, 관객으로 참여한 공연, 전시, 행사의 감상과 후기를 나누는 모임입니다. 올해 새롭게 모인 3기 멤버 역시 예술의 미학적 완성도에서 접근성 이슈까지, 장애 당사자의 관점에서 자유롭게 이야기 나눕니다.
12월의 리뷰▶ 전시 《Wherever : 순간이 새겨진 곳》 | 마술 〈최현우 19+I〉 | 무용 〈덤불〉 | 연극 〈몬스터 콜스〉 | 전시 《감각한 차이》 | 전시 《2024 타이틀 매치: 홍이현숙 vs. 염지혜 《돌과 밤》》 | 연극 〈정원사와의 산책〉 | 낭독공연 〈2024 청소년극 창작벨트 낭독공연 <반>〉 | 연극 〈보이스오버〉 | 상영회 〈눈치컷CUT, 너를 웃기고 싶다 〈농담〉〉
정지영
2024년 ‘이응노의 집’에 입주한 김진 작가의 전시회를 보러 홍성으로 고고! 지난 4월 김진 작가의 작품 준비 과정을 보러 갔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들을 주워 모은 작업실을 보며 이것이 어떻게 작품이 될까 궁금했는데, 전시회에서 궁금증이 풀렸다.
“〈초록 돌을 품은 땅〉에서 김진은 일반적인 회색 돌들과 달라 외롭지만 보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상상 속 초록 돌을 찾기 위해 홍성의 여러 곳을 탐방하며 땅과 흙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전시회 소개 글에 나온 초록 돌을 찾으러 전시장을 기웃기웃. 찾았다!
버려진 타이어가 초록을 덮어쓰고 둥근 기둥 위에 작은 종지를 이고 있다. 길가에서 주운 나뭇가지가 초록을 덮어쓰고 만세를 부른다. 녹슨 파이프 머리 위에 초록색 컵 받침. 한들한들 흔들리던 풀잎이 꼿꼿이 서 있으려 애를 쓴다. 김진 작가도 우리 마음을 따뜻한 봄의 색으로 보여주려 애썼다. 초록초록한 전시실.
여러분도 발밑을 내려다보고 나만의 초록 돌이 어디 있나 살피다 보면 반드시 찾아낼 거예요. 땅은 모든 것을 품고 있으니까요.
강하림
연말 금요일 저녁에 최현우 마술사의 공연 〈19+I〉을 봤어요. 제목은 19가지 마술과 아이(I, 어린이)에 대한 마술이라는 의미여서, 어린이도 즐길 수 있는 마술이 많았어요. 신기하고 화려한 마술 공연을 좋아하는 편이라 전에도 이은결 씨 공연도 본 적 있고, 최현우 마술사 공연도 본 적이 있어요.
원래는 뮤지컬을 볼까 생각하면서 네이버 공연 정보를 찾아보다가 마술 공연이 있길래 이걸로 선택했어요. 이번에는 혼자서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혼자 공연이나 영화도 보고 밥도 잘 먹는 편이에요. 아직 혼자 고깃집에 가본 적은 없지만, 중국요리, 돈가스, 쌀국수 등등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혼자 잘 먹는 편이에요. 혼자 가는 게 편할 때도 있어요. 다음에는 부산에 혼자 여행 가서 밀면도 먹고 바다도 보고 싶어요.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은 엄청 큰 공연장이었는데 연말이라 가족이랑, 친구랑, 연인이랑 보러 온 관중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공연장도 크고 입구도 많아 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안내하는 분들이 잘 안내해주셨습니다.
정말 신기한 마술이 많았는데, 무대 위에 있던 오토바이가 사라졌다가 관중석 맨 뒤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최현우 마술사가 철창 안에 갇혀 있었는데, 바깥에 있는 다른 마술사와 바뀌어 있기도 하고…. 2시간 동안 규모가 큰 마술을 계속했어요. 무대도 화려하고, 마술도 재미있고 신기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마술을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카드 마술 같은 걸 하면 친구들 모임 같은 데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이 공연이 저의 올해 마지막 공연이었는데요. 마술쇼도 재미있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 비슷한 이야기였던 대학로 연극 〈아찔한 연애〉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 조력자와의 대화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서주현
〈마/더스〉 공연을 본 이후 언어가 아닌 움직임으로 짜인 공연에 관심이 갔다. 이어서 이탈리아의 유명 예술가 키아라 베르사니의 공연이 올라왔는데, 키아라 베르사니는 골형성부전증이라는 뼈가 잘 부러지는 장애를 가진 여성이다. 나의 절친도 같은 장애가 있어 키아라 베르사니의 공연을 보여주고 싶었다.
조금 일찍 극장에 도착해 공연 책자를 보며 기다렸다. 보통 그림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아무래도 대사가 없는 공연은 어려울 것 같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보고 싶었다. 키아라 베르사니는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느낀 감정에서 이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팬데믹에서 버려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장애로 인해 움직이지 못한 채 한곳에 오래 머물러야 하다 보니 장소를 구석구석 익히게 됐다고. 길을 찾는 법은 몰랐지만, 휴식을 취하거나 평온과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은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한다.
무대에서는 키아라 베르사니가 공연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바닥에는 하얀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마시멜로였다. (어쩐지 공연 내내 달큼한 향내가….) 강한 백색 조명이 직선으로 뻗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강렬함을 느꼈다.
공연과 함께 시작하는 사운드는 녹음이 아닌 무대 왼쪽에 자리한 믹싱 기계로 만들어내는 싱싱한 라이브 사운드였다. 무대 왼쪽에서부터 키아라 베르사니는 바닥을 기는 듯한 자세로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마치 태초 생명의 시작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또 한 명의 퍼포머가 나와 똑같이 바닥을 헤엄치며 우주를 돌아다닌다. 둘은 그 공간에서 스칠 듯 닿을 듯 헤매고 헤매다 끝내 만난다. 여기서 왜 아담과 이브가 떠올랐을까. 공연 내내 강한 조명과 사운드. 폭풍우 속인 듯, 우주인 듯, 거세게 파도가 치는 바다인 듯….
난 나름대로 나에게 쏟아지는 감정을 부지런히 이미지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공연 말미에는 관객을 보며 손짓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어로 ‘안녕’이라는 인사였다고 한다. 그러다 관객 속에서 하나둘 무대로 들어가 그들은 함께 엉킨다. 나도 나가야 하나? 분명 짜인 연출이지 않을까, 하면서도 괜한 긴장감이 돋는다.
언어의 몸짓으로 더 강한 메시지를 주는 공연! 더 몰입하고 더 감동하고 더 소름 돋는 시간을 경험했다.
서주현
연이어 외출하기가 좀 힘들었지만, 공연에 대한 기대로 국립극장에 도착했다. 이제 공연장에 가면 한두 명은 낯익은 사람을 만난다. 역시나 이날도 지인 몇 분을 오랜만에 만나 반가움에 인사를 나눴다. 내 자리는 입구에서 가깝고 무대가 아래쪽에 위치해서 아주 잘 보였다. 공연 전에 받은 책자로 예습했다. 응? 수어통역하는 분들이 배우마다 옆에 자리하고 함께 공연에 참여하나? 평소 어느 정도 배리어프리 공연은 봤으나 이 정도로 디테일한 공연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자칫 산만해지지 않을까, 배우와 혼동되진 않을까, 그래서 공연 자체에 집중이 흐려지면 어쩌나 노파심이 들었다.
공연 전 안내가 시작된다. 무대 구조를 설명하고 조명, 음향, 자막 등 참 섬세하게 안내한다. 그리곤 시작되는 공연. 동명의 소설을 제목으로 한 연극 〈몬스터 콜스〉는 13살 소년 코너가 자신의 삶에서 감당하기에 너무 큰 상실을 앞둔 시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사실 원작을 몰랐기에 처음에는 살짝 혼란을 겪었다. ‘뭐지? 누가 코너야? 누가 엄마고, 누가 아빠지? 서술자는 뭐고? 음, 좀 혼란스러운데?’ 하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모두가 코너였다.
여태 본 공연 중 가장 신선한 자극이었다. 이런 구조의 연출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배리어프리라고 하면, 자막이나 수어통역사 한 명이 무대 가장자리에 있는 정도인데, 수어통역사가 연기자 못지않게 함께 연기한다? 처음의 걱정은 기우였고 공연에 몰입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참 많은 대사를 외우는 배우들이 대단했고, 무대 디자인도 꽤 인상적이었다. 특히 무대 가운데 설치된 갈라진 벽 사이에 자막이 흐르는 구조는 장애‧비장애를 떠나 극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단, 대사 실수하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배우에겐 리스크였을까.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 살짝 머리로 방아를 찧었지만, 중반부로 갈수록 다시 집중했다. 코너가 할머니의 물건을 부수는 장면에서 관객 중 1/3은 눈물을 훔치는 듯하다. 첨엔 왜, 왜 울지? 의아했는데, 잠시 후 코끝에서 찌잉…. 으음, 참아야지, 꾹 참아야지. 어린 소년이 감당할 상실은 아마도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부정하고 싶어서 본인 스스로가 괴물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인정하기 싫은 미래, 정해진 미래, 알면서도 모른척한 미래. 그래서 정말 공감 가는 바이다. 막바지로 들어섰을 때 코너는 결국 받아들이고 여태 참아왔던 속마음을 말한다.
아무리 자주 마주쳐도 익숙해지지 않는 죽음, 가족의 상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나 역시도 열린 상실. 그 언젠가 마주하게 될. 아무리 단단하게 근육을 단련시켜도 그 앞에 무너질 걸 알면서도 우린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상실 후 더 단단해진 코너이길. 코너였던 모든 배우에게 찬사의 박수를 보낸다.
정지영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가 언제였더라?
이성수 님과 김원영 님이 출연한다고 하여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제겐 공포 연극이었어요. 밤 12시 7분, 느닷없이 뒷마당에서 나타난 몬스터가 세 가지 얘기를 해줄 테니 네 번째 이야기는 너의 진실을 이야기하라고 했을 때부터 소름. 왜냐면요, 청소년기에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게 어렵지 않겠지만, 저는 이미 청소년이 아니기에 ‘저걸 어떻게 얘기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픈 엄마 대신 집안일도 하고 혼자 학교 가는 것도 익숙한 코너는 아직 어린 소년이에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소심하고 조용한 소년이죠.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가 지나가고 코너가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죠. 몬스터가 빨리 진실을 말하라고 하는데 ‘아! 저 말을 어떻게 할까?’ 두근두근. 결국 코너는 엄마의 병이 깊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 엄마의 회복을 바라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른 엄마를 놓아야 한다는 진실을 동시에 말해요. 훌쩍. 어린 코너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겠지만 진실을 말함으로써 모순투성이 어른의 세계로 성장해 나갈 거예요.
끝나고 이성수 님을 못 만나서 아쉬웠지만, 마지막 공연이라도 본 게 얼마나 다행인지. 2024년은 연극을 많이 본 해였어요. 연극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죠. 2025년에도 더 많은 공연을 보고 싶다는 설렘.
아, 그리고요. 지하주차장만 가면 몬스터의 목소리가 들리고 엄마를 보내고 싶지 않지만 놓아야 한다는 진실을 말한 코너의 대사가 생각나 머리가 쭈뼛쭈뼛해요. 원래 이런 연극 아닌 거죠? 아마도 누군가의 손을 놓아버렸던 개인적인 경험이 이렇게 연결되었나 봐요. 작가는 모르는 관객의 경험이 극작의 의도에 얹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답니다! 그나저나 수어통역 하신 분들의 연기도 인상 깊게 보았어요!
저에게 누군가 “진실을 말해야 한다!”라고 하면 전 어떻게 대답할까요? 제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은 뭐가 있을까? 저의 내면을 뒤져 하나라도 찾아낸다면 저도 성장할 수 있을까요? 나이는 많지만….
서주현
1년 전 모두예술극장 개관식에 참석했던 게 어제 같은데, 얼마 전 서울역 인근 서울스퀘어에 ‘모두미술공간’이라는 배리어프리 전시공간이 문을 열었습니다. 장애인콜택시를 불러 타고 가는 중 집회 군중에 갇혀 못 갈 뻔했지만,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해서 개관식에 참석했습니다. 전시장은 1전시실, 2전시실로 기획되어 있고 세미나룸 등 다양한 부대 공간도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유동적인 가벽이 설치되어 있어 설치미술,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기획이 가능한 전시장이었습니다. 전시에는 점자, 수어, 필담 등 장애 특성에 따라 설명이 배치되어 있었어요. 오픈 행사를 마치고 전시실로 옮겨 도슨트 설명을 듣고 다과회까지 참석했습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얼마나 다양한 전시가 이루어질지 기대됩니다.
정지영
손이 시린 겨울. 서울 북쪽 끝으로 미술관에 방문했습니다.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은 2층까지 뻗어 올라간 인수봉의 붉은색 탁본이었습니다.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이 비디오로 상영되고 있었고, 헤드폰에서는 거친 숨과 펄럭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올라가 보지 못한 인수봉을 여기서 이렇게 마주하니 인수봉의 거친 암석 표면 속에 숨어있는 긴 핏줄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인수봉이 살아있는 듯하여 이 돌의 밑에, 밑에 지구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나도 미술관을 통해서 지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지구의 숨소리라도 들릴 듯하였습니다. 현재 지구 사랑에 빠져 있는 나에겐, 돌과 비석 등을 씻고 말리는 사람, 돌을 대변하고 있는 퍼포머의 몸짓은 인간과 물질을 이어주는 듯도 하였습니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것은 생명뿐 아니라 돌과 같은 물질도 있음을 잊고 있었다는 자각에 또다시 투시경이라도 쓴 것처럼 미술관 바닥 그 밑, 그 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다음은 땅을 마주하고 싶습니다.
해랑
제목처럼 산책에 초대되어서 다녀온 느낌이 드는 공연이었다. 객석은 캠핑 의자로 구성되어 있고, 극장 문은 항상 열려 있어서 언제든 원할 때마다 자유롭게 극장 바깥으로 오갈 수 있었다. 산책하다가 숨이 차거나 힘이 들 때 벤치에 앉을 수 있는 것처럼, 객석 뒤쪽에는 긴장 완화 객석이 있어서 공연 중에 잠시 일어서거나 기대서 쉬거나 움직일 수 있었다. 관람에 집중하고 싶어서 극장 밖을 나갔다가 오거나 긴장 완화 객석을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긴장을 풀어줄 수 있는 인형을 가지고 들어가서 쓰다듬으면서 봤다. 인형이 많지는 않아서 우연히 만난 지인이 양보해준 인형을 들고 들어갔다.
방 안에 있는 두 사람이 인터넷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인데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정말로 같이 산책하는 느낌이 들었다. 관람하면서 배우들이 대사를 말하기도 전에 한글 자막이 미리 송출되어 의아한 느낌이 들었는데, 자막 디자인을 담당한 분께 들은 바로는 채팅으로 극이 전개되는 걸 전제로 하기에 의도한 거라고 했다. 다른 관객은 자막을 보면서 내용을 미리 알게 되어서 한글 자막이 있는 극은 불편하다고 생각하게 될까?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했다. 극 자체는 슬프기도 하고 내 삶을 돌아보게 되기도 하고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다.
프로그램 북은 따로 없었지만, 티켓에 QR코드가 있었다. 프리프로덕션 다큐멘터리, 드라마터그의 글, 연습일지, 극에 나온 음악 목록, 공연 사진, 극을 만들기 위해 참고했던 책들이 상세하게 준비된 사이트가 나왔다. 관객을 위해 다정하고 사려 깊게 준비를 많이 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극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공연을 보고 극장을 나와서까지 따스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3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금방 지나가서 신기했다. 검은 새와 가드너가 데이터와 함께 개기일식을 보러 모잠비크로 떠나는 긴 여정에 함께해서 좋았다. 마침표 아니, 쉼표가 계속되는 삶이길.
이성수
연극을 보면서 진실과 착각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리며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나누었던 우정과 사랑과 미움과 분노와 시기와 질투 같은 것들이 정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생각합니다. 내 기억은 얼마만큼 사실을 사실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얼마만큼 왜곡되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과거의 어느 날 있었던 그 사람이 어쩌면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퍼지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붙잡고 싶은 기억과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 사이에서 본능적으로 기억을 또 왜곡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진실과 얼마나 많은 왜곡 사이에 나는, 우리는 있을까요.
연극을 보면서 열정과 에너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젊음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싸우고, 뜨겁게 화해하고, 그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그리워합니다. 사랑과 화해는 지금도 물론 반복하고 있지만, 10대 시절의 그것과는 무척 다르다고 느낍니다.
연극을 보면서 진심에 대해 생각합니다. 진심은 담백합니다. 화려하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진심은 그냥 진심입니다. 사랑도 사과도 진심이면 좋겠습니다. 제발 그럴 수 있기를 항상 바랍니다. 나는 내가 진심이 아닐까 봐 늘 두렵습니다.
이성수
“나에게는 어떤 장면들이 있다. 여전히 눈에 선하고,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활자로 옮길 수 있는 그런 장면들이 있다. 단, 모두 무음 상태이지만 말이다.” - 연극 〈보이스오버〉 중에서
그 선명한 어느 날의 기억이 꼭 할머니일 필요는 없다. 친구, 헤어진 연인, 선배 혹은 후배, 선생 혹은 제자 등등 누구나와 관련된 기억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필 나는 이 연극의 작가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선명한 그 얼굴, 그 손, 그 주름, 그 목소리, 그 웃음, 그 냄새, 그 품속 그대로인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서주현
시끄러운 시국과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장애여성공감 춤추는허리의 웹드라마 상영회가 있어서 외출을 나섰다. 연극도 아닌 전시도 아닌 웹드라마?? 사실 장애여성공감 조미경 공동대표가 절친이어서 뭘 찍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상영회 소식이 올라오고 바로 신청했다. 광화문에서 상영회 장소까지의 거리가 휠체어로는 용이하지 않아 공감에서 리프트 차량을 지원했다. 픽업 장소에 조금 일찍 갔지만 바로 차량이 와서 상영회 장소까지 안전하게 이동했다.
“국내 최초 ‘장애여성’ 웹드라마, 장애여성 최다출연!” “서로를 돌보는 감각과 역량인 ‘눈치’로 웃기고 싶다” 웹드라마 ‘농담’은 1화 〈몸의 대화〉, 2화 〈나 똥싸개 아니야〉, 3화 〈연애 같은 연애〉, 4화 〈웃는 연습〉 등 총 4편으로 구성되었다. 드라마 속 배경은 장애여성자유생활센터[담]인데, 다큐와 허구가 혼재된 이 배경은 실제 한국 사회 장애인권운동의 중요한 현장인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모티브로 한다. 여기까지가 소개자료에 쓰인 내용의 일부다.
나와 공감의 인연은 어느새 20년이 넘어간다. 그래서 영상 속에 나오는 배우들은 모두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중 삼십년지기 친구의 모습은 낯설기도 하면서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의 이야기 나오자 당황스러울 만큼 눈물이 터졌다. 시작부터 보는 내내 웃음이 나온다. 무겁든 무겁지 않든 큭큭하며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장애인단체에 신입으로 입사한 비장애인 활동가가 낯선 장애와 눈치껏 적응하며 익숙해져가는 이야기 속 숨어있는 웃음. 장애인단체이지만 같은 장애인은 없다. 그러면서 눈치껏 서로를 탐색하고 적응하며 서로가 서로를 살피는 눈치 단수가 올라간다. 일명 ‘눈치 백단’이라는 말이 이런 데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친구의 이야기가 나온다. 친구는 3년 전 뇌출혈로 인해 죽다가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장애들을 안고 왔다. 중증장애를 가진 몸에서 더 최최최중증장애인으로 변한 몸. 힘내라는 말조차 아무 도움이 안 될 그 시간을 홀로 견디며 이겨냈다. 웃음을 잃어버릴까 봐 계속 웃는다는 친구. 호흡기를 하고 자야 하는 상황에서도 웃는 친구. 화면 속 친구는 계속 웃지만, 난 눈물만 흘렀다. 상영회가 끝나고 나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며 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하지만 나의 질문은 그냥 숨겨놓았다. 모든 배우의 연기가 자연스럽고 연출과 영상도 너무 훌륭했다. 왜들 이렇게 연기를 잘해~~ 모든 순서가 끝나고 인사를 나누며 배우 한 분이 “담엔 함께 하셔야죠!” 하는데, “시켜만 주신다면! ㅋㅋㅋ”이라고 답했다. 추운 날씨에 신선하고 감동이 함께했던 웹드라마 한 편 잘 보고 돌아왔다.
강하림
사회적기업 베어베터에서 9년째 일하고 있다. 광명시장애인가족지원센터 소속 인권강사,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직장내 장애인인식개선교육 파트너강사, 장애인권교육 협업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뮤지컬과 영화 보기를 좋아한다.
17dagala@naver.com
서주현
그림 그리는 사람. 어려서는 핑크로 도배할 만큼 핑크색을 좋아하다 우연히 잡지에 실린 재미로 보는 운세(?) 같은 코너에서 내 행운의 색이 빨강이라는 글을 본 후부터 지금까지 내 소울 컬러는 빨강이다.
iamboil@nate.com
이성수
중도 저시력 시각장애인. 힘빼고 컴퍼니 대표. 연극, 글, 장애인식개선, 워크숍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대화하고, 놀이하는 사람. 2023년 배리어컨셔스 연극 〈국가공인안마사〉, 2024년 모두의 연극 〈도깨비 안마원〉 작품에서 극작, 연출, 출연했다. 2024년 배리어프리 에세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를 함께 썼다.
페이스북
유튜브채널 힘빼고컴퍼니
정지영
5월의 연둣빛과 6월의 해질녘 서늘한 바람을 좋아한다. 지식이 조금 넓고 말이 많지만 깊이 들어가면 조용해진다. 2000년부터 장애인단체에서 일하다 보니 귀결은 유니버셜디자인! 지금은 대구대학교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물론 취향은 존중하지만)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제30조(문화생활, 레크리에이션, 여가생활과 스포츠 참여)를 잊지 맙시다!
jiyoung.jung74@gmail.com
해랑
관심사가 많은 사람. 농인의 문화예술 향유권에 관심이 있으며 종종 접근성 자문, 모니터링을 한다. 아티스트, 공연 관계자, 관람객을 위해 「문자통역 신청 매뉴얼」을 제작·배포했다. 《2023 SPAF》, 《모두예술주간 2023》, 연극 〈이런 밤, 들 가운데서〉 등에서 접근성 자문을 했고, 2024년 재공연한 〈인정투쟁; 예술가 편〉에서는 접근성 창작진으로 함께했다.
deafjam66@gmail.com
사진 및 캡션 제공.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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