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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모두예술극장 해외희곡 낭독공연 〈볼링의 역사〉 수치심을 강요하는 세상에 ‘빅엿’을 날리다

  • 이진아 연극평론가
  • 등록일 2025-02-26
  • 조회수 32

리뷰

작가 마이크 어빈(Mike Ervin)을 구글링하여 그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가슴에 슬로건 같은 것이 쓰인 검은색 반팔 티셔츠에 사파리 모자를 쓴 털북숭이 백인 남성이 휠체어에 앉아 시가를 아무렇게나 문 채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쏘아본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며 장애인권운동가인 마이크 어빈이다. 미국 장애인권단체 ADAPT에서 활동하면서 약 20번 체포되었다고 자랑하는 인물이다. ‘Smart Ass Cripple’(건방진 장애인 녀석이라는 뜻)이라는 필명으로 2010년부터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풍자(sarcasm)로 고통을 표현하기”라는 모토로 글을 쓰고 있는데, 그가 포스팅한 글 중 인상적인 문구가 있다. “무효화되는 것(invalid)은 빈털터리(broke-ass) 불구자(invalid)에게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이 문장을 보자 바로 출판된 희곡집 『볼링의 역사』 ‘작가 노트’의 문구가 떠올랐다.

마이크 어빈은 〈볼링의 역사〉가 수치심을 거부하는 힘과 영광에 관한 이야기이자, ‘invalid’라는 딱지가 붙은 작은 상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척과 루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invalid란 단어의 첫음절에 강세를 두든 두 번째 음절에 강세를 두든 상관없다. 어차피 같은 뜻이니까”라고 시니컬하게 말한다. 〈볼링은 역사〉는 이 두 단어가 동일시되는 세상에 맞서는 이야기다. 이 단어가 장애인에게 낙인이 되는 세상에 맞서는 이야기다. 장애가 있는 나를 무력화하는 동시에 포르노적으로 전시하려는 세상에 맞서는 이야기다. 연민이나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그렇다고 하여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거나 뭘 주장하지도 않고, 그저 그들의 관음증과 사디즘을 노골적으로 수면 위에 드러냄으로써 한 방 날리는 작품이다.

동정도, 관음도, 어디 하고 싶으면 실컷 해 봐

작가는 장애 캐릭터를 긍정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신의 장애를 살아가는 데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한다. 필요로 동정심을 얻거나, 하기 싫은 일을 회피하거나 하는 것에 자신의 장애를 이용한다. 등장인물 루는 이를 “병신 놀이”라고 자조적으로 지칭한다. 장애는 멋진 외모, 특별한 두뇌, 피부색 등 개인을 둘러싼 여타의 조건들처럼 삶에 복잡한 계기를 마련하는 요소 중 하나다. 비장애중심적으로 설계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장애를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한다.

이 작품의 두 주인공, 즉 뇌전증이 있는 22세 여성 루와 사지마비가 있어 전동휠체어를 사용하는 32세 남성 척이 만난 것도 이 때문이다. 루는 자신에게 뇌전증이 있다는 의사 진단서를 가져가면 필수학점인 체육 수업에서 제외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체육 교사 옷을 입은 악마 반스”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같은 이유로 수업에 참여할 수 없는 다른 장애인 학생과 공동으로 스포츠 활동에 대한 보고서를 쓰라고 말한다. 이 보고서는 학기 말에 운동부 학생들로 구성된 청중 앞에서 발표하게 될 것이다.

루와 함께 보고서를 써야 하는 학생은 척이다. 그는 대놓고 “병신 놀이”를 하는 인물이다. “나는 진단서의 왕이야.”라고 그는 비꼬듯 말한다. 척이 쓰려는 볼링에 대한 보고서도 그런 맥락의 것이다. 비장애인이 보고 싶어 하는 ‘장애인의 감동적인 스포츠 체험’ 말이다. 그는 1962년 맥도날드 부인이 고인이 된 남편을 기리기 위해 창설했다는 불구 어린이들을 위한 볼링 클럽 “볼링 버디즈”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볼링 버디즈는 소위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와 “볼링”의 결합이었다. 척은 어린 시절 이 단체에서 다른 장애 어린이들과 함께 볼링을 했다. 볼링 버디즈의 모토는 “누구나 스트라이크를 칠 수 있다”로, 소형 미끄럼틀 같은 경사로 위에 공을 올려놓고는 누구나 어떻게든 공을 굴리기만 하면 스트라이크가 되도록 만들었다. 볼링 버디즈의 게임에서는 그 누구의 공도 홈으로 빠지지 않았다. 교회 봉사자들이 레인 옆으로 달려가 홈에 빠지려는 공을 제자리에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척은 이 ‘사랑과 휴머니즘 넘치는’ 모욕적인 스포츠 활동을 보고서에 담고자 한다. 체육 교사 반즈의 장애 포르노적이고 사디즘적인 취향을 ‘노골적인 병신 놀이’로 되받아주려는 시도다. 루는 척의 이러한 기질에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다.

이 작품에는 척과 기숙사에서 한방을 쓰는 룸메이트 코넬리우스, 일명 코니로 불리는 인물도 등장한다. 그는 청각장애인이자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도박과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인물로, 거짓말도 거침없이 잘하는 이기적인 카사노바다. 철학과 문학을 전공하는 코니는 보들레르를 인용하고 와인을 잘 아는 척하면서 분위기를 잡아 여자들을 유혹한다. 코니가 무해하고 예민한 시인인 척하는 것에 그의 장애가 일정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부인하긴 어렵다.

장애 자긍심을 갖는다는 것

〈볼링의 역사〉는 1999년에 창작된 작품이다. 대대적인 장애시민불복종 운동의 결과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을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미국장애인법(ADA)이 1990년 통과되고, 장애 정체성 운동과 장애인 자긍심 운동을 향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사회적 분위기의 한복판에서 창작된 작품이다.

척은 비장애중심적 세계가 장애인을 위해 만든, 위선과 동정심과 보호로 점철된,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행복하고 멍청한” 평화를 깨고 싶어 한다. 그 안전한 환경을 깨고, 장애가 있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어 한다. 장애를 부끄럽게 여기도록 은밀히 강요하는 세계의 위선을 드러내고자 한다. 장애인이 수치스럽지 않을 때 위험해지므로. 그래서 그는 “공식적으로 수치스러운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이것이 그가 보고서 〈볼링의 역사〉를 쓰는 이유다. 조용하지만 강한, 그의 장애 자긍심 투쟁이다.

그런 이유로 척은 발작할까 봐 뇌전증약을 선제적으로 먹는 루에게, 그녀가 치어리딩 중 휘청거리는 것을 봤다면 바로 사랑에 빠졌을 거라 말하고, 자신에게 키스하는 루에게 만약 자신이 발달장애였어도 키스할 거냐고 묻는다. 척은 장애 있는 몸의 섹시함과 특별함에 대하여 강변하고 싶어 한다. 그가 루에게 자신의 누드 사진을,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상처투성이 불구에 흠집 난 모습”을 찍을 수 있도록 허락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척은 루를 만나 자신의 세계를 한 번 더 깬다.

명민하고 재치 있지만 냉소적인 척은 매력적인 캐릭터다. 작가 노트에 따르면 이 인물은 “머리와 어깨 외에는 어떤 부분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이다. 척의 매력은 세계를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과 그것을 표현하는 차가운 위트를 가진 언어에서 나온다. 배우 하지성이 척을 맡아,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여리고 예민한 부분을 빈정거리는 듯한 공격적인 말투로 애써 감추는 복잡한 인물로 구현해 낸다. 루는 활기차고 능동적인 인물이다. 청소년 시절 치어리딩을 했을 정도로 활달하고 사교적이다. 그러나 자신의 장애를 감추느라 연애에는 번번이 실패한다. 루 역시 척을 만나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대면하며 성장한다. 김윤정의 루는 밝고 경쾌한 에너지가 가득하다. 상대적으로 차고 정적이며 염세적인 느낌의 하지성의 척과 좋은 조화를 이룬다. 최악의 반전 빌런인 코니는 이승규 배우가 연기한다. 독특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승규의 코니는 느긋하게 자신만의 템포로 말을 이어가면서 사람을 홀리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반즈는 배윤범이 맡았다. 딱 버티고 서서 꼭 필요할 때 외에는 크게 움직이지 않으며 거만하게 말하는 것을 통해 위선과 뻔뻔함의 화신과 같은 인물로 반즈를 구현한다.

모두예술극장의 ‘해외희곡 낭독공연’으로 공개된 세 작품 중 〈볼링의 역사〉는 가장 낭독공연의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다. 신재훈 연출은 욕심내어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깔끔한 조명으로 배우들을 오롯이 드러낸다. 가끔 음악이 장면을 도울 뿐이다. 낭독의 즐거움과 힘을 십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볼링의 역사〉는 자신의 고통을 농담과 유머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지니는 정신의 강인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동시에 명민하고 재치 있는 언어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작가는 전형적이지 않은 장애 캐릭터를 무대에 불러왔다. 척, 루, 그리고 코니와 같은 매력적인 인물을 더 자주 무대에서 만나고 싶다.

  • 하지성 배우가 테이블 위에 놓인 대본을 보며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킨 채 대사를 하고 있다.

    척을 연기하는 하지성 배우

  • 자막에 “코넬리우스 : 카드를 문지르며 생각한다”라고 쓰여 있다.

    척(하지성)과 코니(이승규)

  • 이성수 배우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을 보며 보고 있다. 자막에는 “척의 카드를 카드 홀더에 놓는다. 척은 꽤 취한 상태로 게임을 따라가지만 별로 관심은 없어보인다”라고 쓰여 있다.

    지문을 읽는 이성수 배우

  • 나란히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 독서대에 놓인 대본을 보고 있다. 자막에 “척 전동 휠체어를 타는 남성, 대학생, 32세. 반즈 체육 선생님, 40세. 코넬리우스 시각장애인이자 청각장애인”이라고 쓰여 있다.

    지문(이성수), 반즈(배윤범), 척(하지성), 코니(이승규), 루(김윤정)

볼링의 역사

볼링의 역사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2025.1.24.~1.25.|모두예술극장

작가이자 장애인권운동가로 활동하는 마이크 어빈의 작품으로, 유머와 로맨스의 조화를 통해 장애인의 삶을 탐구한다. 날카롭고 유머러스한 척과 루를 중심으로 그들의 로맨스, 절친한 친구 코넬리우스와 체육 선생님 반즈의 관계를 그리며 사랑, 정체성, 회복력에 대한 진심과 재치를 펼쳐낸다. 회복력, 적응력,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볼링’은 사회적 시선을 극복하고, 삶을 진정성 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척의 자세를 반영한다. 또한, 장애인의 자부심, 독립성, 평등을 위한 투쟁이라는 주제를 엮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오해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경쾌하면서도 영향력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음온라인 문화소식

이진아

이진아

연극평론가,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tikicat@empas.com

사진 제공.(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옥상훈)

2025년 3월 (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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