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지난 1월 말 설날 연휴, 많은 눈이 내리던 서울시립미술관은 차분하고 한적했다. 오랜 세월을 간직한 듯한 양식과 현대적인 마감이 어우러진 미술관을 오가는 사람들에게서도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나도 함께한다. 미술관 3층 세마엘 전시장에서는 ‘모두를 위한 예술 프로그램’ 참여예술가 다이애나랩의 활동을 기록한 《어떻게 나에게 빨강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가 전시되고 있었다. 워크숍을 통해 서울시립미술관의 관람 환경과 전시 접근성에 대해 고민한 과정과 결과를 더 접근성이 있는 방식으로 선보였다.
전시 공간이 전하는 이야기
전시는 크게 4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공간1: 워크숍 참여자 4인의 인터뷰 영상 〈빨강에 대하여〉
- 공간2: 워크숍 현장 영상 〈미술관은 누구에게 열려있는가 2024〉
- 공간3: 촉지도 형태의 테이블에 앉으면 당사자 인터뷰 멘트가 들리는 〈길을 잃은 지도〉
- 공간4: 워크숍 시나리오 월 텍스트와 접근성 체크리스트
공간1에는 대형 스크린에 영상이 재생 중이고, 그 앞에는 긴 의자와 무선 헤드셋이 방문객을 기다린다. 영상은 〈빨강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워크숍에 참석한 장애예술가 3인(김은설, 김환, 장근영)과 비장애 연출가 1인(신재)의 인터뷰 구성이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예술과 장애 그리고 접근성에 관한 이야기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들려준다.
“전시의 접근성은 감각의 제한을 만들어요. 접근성이 있어야 감각이 열려요.”
“미술관은 접근을 허락받아야 하는 공간 같아요.”
“현장 안내 인력이 공연/전시의 연장선상에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공간2는 위의 참여 장애예술가 3인의 미술관 접근성 현장 워크숍 영상이 3개 채널로 나뉘어 재생되고 있다. 시각장애, 청각장애, 지체장애 등 각 장애의 특수성과 그로 인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어려움이 이야기되고, 당사자의 입장에서 더 나은 경험을 위한 의견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계단은 정면에 있지만 경사로는 옆에 있네요. 직원 도움 요청 버튼도….”
“화장실 점자 안내표지가 있는 곳 바닥에 점자블록이 없어요.”
“안내 방송은 음성으로만 나와서 청각장애인은….”
공간3에는 테이블 위 천장에 설치된 지향성 스피커에서 시각장애 예술인(김시락)과 비장애예술인(109(김지영), 박하늘, 유선)의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다. 미술관과 전시 그리고 접근성에 대한 인터뷰 음성이었다. 나도 시각장애를 경험하고 있어서 비슷한 의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전혀 달랐다. 장애 정도와 살아온 경험이 확연히 달랐고, 그만큼이나 긍정과 부정의 측면이 다양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테이블에는 미술관의 구조를 안내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촉지도가 마련되어 있어 인상적이었다.
“미술관은 시각장애인이 느낄 수 없는 콘텐츠에요. 층만 바뀌지….”
“학교에서 자주 갔는데 걷느라 다리만 아파요. 만질 수도 없고, 조심하라고 혼나고…”
“빨강을 보지 못해도 빨강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보이는 것처럼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빨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어요.”
“바다의 파랑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바다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공간4는 전시장 벽면이다. 미술관을 찾아오기 위한 첫 시작인 지하철역에서부터 미술관까지의 이동 흐름과 중간중간 발견되는 경험과 인식의 차이, 새로운 시각 등을 알 수 있는 워크숍 참가자들의 목소리가 월 텍스트로 남아있다.
“출입구를 찾기도 힘들고, 도움받을 사람을 찾기도 힘들고….”
“대부분 촉지도에 먼지가 너무 많이 껴있으니까 너무 더러워서 만지기도 싫고….”
“사방이 막혀 있는 유리벽만 만지다가 오는 그런 느낌”
그리고 월 텍스트 옆에는 워크숍에서 사용했던 체크리스트가 비치되어 있다. 이 전시에 오는 모두가 접근성 워크숍에 참여한 것처럼 현장을 느끼고 경험을 이어갈 수 있는 소통 채널이다.
미술관 접근성 이야기
4개의 공간에 전시된 콘텐츠는 세 가지의 주요한 맥락을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다.
- 교통수단에서부터 미술관까지 이동하는 과정의 접근성
- 미술관 건물과 시설물의 접근성
- 전시물의 접근성
미술관이 모두의 문화예술공간으로서 누구나 미술관에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항목을 큰 틀에서부터 사소해서 놓칠 수 있는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미술관까지 이동하는 과정은 공간과 전시를 즐기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의 시작이었다. 인도의 점자블록과 장애물, 바닥의 재질, 경사로의 방향, 점자블록의 위치, 고정문의 위치, 직원호출 버튼 등 미술관을 찾아가는 길에는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미술관 건물과 시설물, 그리고 인적 서비스의 접근성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안내데스크의 높이, 청각장애인과의 소통방식, 점자블록에 관한 규정, 안내표지의 높이·크기와 색상, 장애인 화장실 그리고 비상시 음성으로만 안내하는 방식까지 논의하며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전시 공간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전시물 접근성 부분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졌다. 휠체어 이용자에게 너무 높은 전시물과 안내 표지, 시각장애인은 느끼지 못하는 시각에만 의존한 전시물, 자막 없는 영상, 휠체어가 지나가기 어려운 동선 등 전시의 핵심인 작품을 즐기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더 나은 미술관의 디테일
이 전시는 미술관 접근성 워크숍을 통해 어려움을 알리고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 전시 자체가 워크숍에서 찾아낸 솔루션을 적용하는 시작점이었다.
전시장 입구에는 큰 안내 화면이 있다. 늘 보던 그런 안내 화면이 아니다. 수어, 자막, 내레이션으로 전시 개요, 공간 구조, 참여한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어 모두가 다양한 감각으로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에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정보들을 각 사용자에게 적합한 감각으로 전달하여 전시를 더 즐길 수 있게 했다.
세마엘은 작은 전시 공간이었고 관람객이 적은 설 명절 연휴의 시작과 끝에 방문했지만, 늘 한 명의 스태프가 상주하고 있었다. 장애가 있는 관람객은 비장애인보다 상대적으로 기존 솔루션과 소통이 어려울 수 있어 다른 형태의 설명이 필요하거나 간혹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어 오프라인 공간의 인적 서비스가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시각장애로 공간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나도 전시 공간과 이용 방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전시 공간에도 스태프가 있었지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솔루션이라고 행복회로를 그려본다.) 전시장 바닥에는 관람객에게 전시 동선을 안내하는 가이드라인이 그려져 있어 장애 유무를 떠나 모두가 더 수월하게 효과적으로 전시를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의미 있게 다가온 솔루션들도 있다. 4개 화면에 재생 중이던 영상 모두 음성해설이 제공된 부분이다. 영상에는 대화가 없는 행동, 공간 전환 등 소리 없이 전달되는 시각정보가 매우 많다. 전시 영상에서는 이런 부분에 음성해설을 함께 제공하여 시각장애가 있는 관람객의 접근성을 높였다. 자막과 수어도 함께 있어서 청각장애인도 영상을 즐기는 데 무리가 없다. 점자도 하나의 솔루션이 되었다. 월 텍스트가 전달하는 정보와 묵자 인쇄물로 비치된 접근성 체크리스트는 시각장애인이 인식할 수 없는 매체인데, 점자 인쇄물을 함께 비치하고 있어 최소한 이곳에서만큼은 동등한 수준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방문자를 위한 솔루션도 돋보였다. 전시물 사이 공간을 여유롭게 두어 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는 동선이 충분했다. 영상을 재생하기 위한 모니터의 높이도 휠체어에 앉아서도 편안히 볼 수 있는 높이였고, 비치된 헤드셋의 높이도 그러했다. 접근성 체크리스트 같은 인쇄물도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높지 않은 위치의 벽에 걸어 놓는 형태로 비치되어 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높이가 애매해서 손이 닿지 않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접근성 솔루션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어쩌면 그냥 지나칠 작은 부분까지 간과하지 않았고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더 접근성이 높았던 전시였다.
공감으로 이어지는 기대
전시장에서 장애를 가진 관람객이 겪는 이런 어려움은 오래전부터 늘 그랬지만, 비장애인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다. 장애 당사자만 경험했던 어려움이기에 작은 목소리였고, 그래서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워크숍이 아니라면, 이런 전시가 아니라면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했을 텐데 이번 전시를 통해 확인되었고 비장애인도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번 전시가 보여준 작은 솔루션들은 의미 있는 시도였다. 나오는 길에 잠시 살펴본 다른 공간의 전시에서 다시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기는 했지만, 다이애나랩의 솔루션과 분명한 차이가 있었기에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런 의미 있는 시도가 이어지기를 바라며 더 나은 전시를 위해 몇 가지 제안하고 싶다. 첫 번째로, 좀 더 다양한 사용자와 소통하면서 장애 유형과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어려움과 요구사항을 발견해 냈으면 한다.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솔루션은 더욱 다양한 사람을 포용할 수 있게 한다. 두 번째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소통하면서 체계적인 프레임을 만들어 냈으면 한다. 당사자의 목소리는 직접적이고 설득력 있지만, 그 영역을 대표하면서 체계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건축물, 영상 등 각 분야에서 객관적인 체계와 근거로 활동하는 접근성 전문가들과 함께 소통한다면, 장애 당사자를 포용하면서도 체계화된 접근성 프레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접근성 워크숍이 일회성이 아닌 상시 업무로 녹아들었으면 한다. 미술관의 다양한 업무와 프로젝트에서 기본 요구사항과 프로세스에 접근성을 고려한 항목을 포함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고도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미술관과 다이애나랩의 이번 전시는 공연과 전시 등 문화예술 영역에서 접근성을 향상하고 모두가 즐기는 문화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증거라 생각한다. 2024년 11월 장애예술계에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에 ‘모두미술공간’을 개관했다. 2023년 10월 ‘모두예술극장’ 개관에 이어지는 의미 있는 소식이었다. 이런 다양한 노력이 모여 모두의 예술이 공존하는 공간이 만들어지고, 모두가 즐기는 문화와 예술이 되는 더 나은 세상으로 이어질 거라 기대한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전시 안내 수어통역과 자막 모니터
참여 예술가 4명의 인터뷰를 담은 〈빨강에 대하여〉
〈전시장은 누구에게 열려 있는가 2024〉 영상과 접근성 체크리스트
〈길을 잃은 지도〉 (사진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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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나에게 빨강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서울시립미술관|2024.11.28.~2025.1.31.|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3층 세마엘
2024년 ‘모두를 위한 예술프로그램’ 참여 예술가 다이애나랩은 2024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0set프로젝트와 함께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접근성 관련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관람 환경 및 서비스 제공 개선 방안을 함께 고민했다.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애인 접근성 관련 강의를 열었고, 관람객과 시설 종사자, 창작자가 함께 공간을 둘러보며 접근성을 조사하는 워크숍을 진행했다. 또 시각장애인 당사자와 여러 차례 인터뷰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러 사람의 경험과 발언으로부터 출발한 워크숍 결과보고전 《어떻게 나에게 빨강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에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소수자 접근성에 대한 질문과 모색, 시도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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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일
접근성 전문가. 다양한 IT 서비스를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접근성을 단기적 배려의 차원을 벗어나 지속 가능한 모델로 체계화하고 비즈니스의 한 분야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가는 데 관심 있다. AI와 같은 신기술이 장애를 경험하는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접근성 관련해 여러 국가표준 개발에 참여했고, 다수의 세미나와 미디어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저변을 넓히고 있다. 시각장애 당사자로서 IT 서비스에서 더욱 실질적인 접근성 향상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2021년에는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고용노동부의 산업포장을 서훈받기도 했다.
haeppa@gmail.com
사진 제공.필자, 서울시립미술관
2025년 3월 (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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