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2002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국제적인 농 축제 ‘데프 웨이 Ⅱ(Deaf Way Ⅱ)’ 행사에 참석했던 경험은 내게 큰 충격과 감명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데프 웨이 Ⅱ는 수어, 농교육, 농예술,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농인의 작품을 소개하고 여러 행사가 펼쳐지는, 농인의 주체성이 뚜렷하게 담긴 세계적인 축제였다. 그곳에서는 농인이 직접 만든 예술 작품과 공연뿐만 아니라 다양한 담론을 담은 주제 발표와 토론회도 둘러볼 수 있었다. 나는 그중 공연을 관람했는데 수어로 펼쳐진 공연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특히 그곳은 20대였던 나에게 처음으로 잘 맞는다고 느껴진 공간이었고, 그 즐거움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갤러뎃 대학교에서 경험한 농인 중심 공연
이후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갤러뎃 대학교(Gallaudet University)에서 공부할 때의 경험도 큰 울림을 주었다. 갤러뎃 대학교는 세계에서 유일한 농인 대학으로, 교수, 학생, 직원 대부분이 농인이며, 청인 또한 미국수어(ASL)를 사용해 수업과 생활을 함께한다. 이곳에서는 농학(Deaf Studies), 농교육학, 사회복지학, 수어통역학, 심리학, 언어학, 커뮤니케이션학 등 다양한 전문 지식을 배울 수 있으며 그중에는 연극학도 있다.
연극학과에서는 공연 기획 초기 단계부터 농인의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형평성과 다양성, 포용성을 바탕으로 더 풍성한 예술을 지향하고, 차세대 농인 예술가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극학과 학생들은 학기마다 공연을 발표한다. 감독, 대본 작가, 연출, 배우, 의상, 무대디자인, 번역가 등 프로덕션 팀은 모두 농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든다. 공연이 가까워지면 대학교 홈페이지와 캠퍼스에 게시된 포스터를 통해 소개되고, 주된 관객은 대학생이지만 관심 있는 외부인도 관람할 수 있다.
농인을 위한 공간, 데프스페이스
나는 공연 포스터를 보고 호기심에 대학 내 이스트먼 스튜디오 시어터(Eastman Studio Theatre)로 향했다. 극장에 들어선 그 순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곳은 농인을 위한 접근성이 완벽하게 반영된 공간이었다. 공연 속 모든 대사가 농인 배우의 수어로 표현되었고, 다채로운 조명으로 시각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무대는 농인 관객이 두 눈으로 공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로 설계되어, 시각적 몰입도를 높인 것이다. 농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공연을 즐겼고, 맨 앞자리에는 시청각장애인이 손을 마주 잡고 수어를 전달하는 방식의 촉수어 통역을 통해 공연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곳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농인을 위한 공간, 즉 ‘데프스페이스(DeafSpace)’였다. 비록 미국수어가 나의 주 언어는 아니었지만, 몰입력 있게 흠뻑 빠져들어 공연을 관람했다. 유학 기간에 그곳에서 여러 작품을 관람했고, 그 경험 속에서 떠오른 많은 영감을 온몸에 가득 담아 한국에 돌아왔다.
유럽 여행 중 뜻밖의 초대를 통해 영국 런던의 농인 전용 극장 ‘데피니틀리 시어터(Deafinitely Theatre)’를 찾게 되었다. 공연을 기다리며 농인 관객들과 수어로 안부를 나눴다. 공연장은 약 50석 규모의 작은 공간이었는데, 이는 무대 위 수어를 시각적으로 더 가깝게 전달하기 위한 설계였다. 농인을 중심에 둔 접근성이 분명히 느껴졌다. 총괄과 조명 담당자를 포함한 모든 스태프 역시 농인이었고, 무대 위 소통은 자연스럽게 수어로 이루어졌다. 공연 후에는 영국수어로 진행된 토크 시간이 이어졌고, 이후 농인 총괄자와 국제수어로 나눈 대화에서 국가의 사업 지원을 받아 농인 배우들과 꾸준히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 작은 공연장은 접근성이 기획의 출발점이 될 때 공연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풍성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농인 작가가 극을 쓰고 농인 연출과 배우가 공연을 만들며, 농인 배우가 무대에 오른다. 공연을 보고 난 뒤에 함께 둘러앉아 작품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이러한 자리는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확장되고 발전하고 있다. 유럽의 농인 예술 생태계 또한 점차 넓어지고 있다. 농인을 위한 공연에서는 농인 감독과 농인 배우가 주체적으로 활약하며, 시각적 예술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한국 농인 예술의 현재와 가능성
「장애인차별금지법」과 「한국수화언어법」 제정 이전에는 공연을 보기 위해 극단과 공연자에게 수어 통역 배치를 요청해야 했다. 공연 수어 통역이 가능한 통역사를 찾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리어프리 공연은 늘었지만, 실제 관람 경험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청인의 공연은 음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리의 문화’이기 때문에 수어로 통역하더라도 농인 관객이 충분히 감정이입하고 공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농인이 직접 극을 쓰고 연출하는 공연이 더 늘어나길 바란다. 농인이 농학교와 농문화의 가치관 속에서 살아온 경험, 구어 중심 사회에서 겪어온 농인의 차별과 연대의 경험, 한국인으로서 6.25 전쟁 및 일제강점기와 같은 기억이 자신의 언어인 수어와 몸을 통해 예술로 표현되고 이야기의 장이 펼쳐지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나는 농인들이 풀어내는 예술을 보면서 농인의 가치관과 농문화가 담긴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피부로 느꼈다.
한국에서도 농예술은 한 걸음씩 발전하고 있다. ‘누비스’는 번역을 바탕으로 수어 노래, 수어 공연, 뮤지컬, 수어 랩, 수어 퍼포먼스 그리고 수어 아티스트 양성을 전문적으로 전개하며 국내를 넘어 해외 공연 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수어민들레’는 수어 시를 포함한 수어 문학, VV(Visual Vernacular, 시각적 토착문학), 데비아(De’VIA, Deaf View/Image Art) 예술 작품에 중점을 두어 교육과 워크숍, 전시와 공연, 해외 초청 공연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농인들이 예술을 통해 수어와 농문화, 농역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더 많은 전문가가 양성되어 사회적 지위와 인권 향상으로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미국과 영국에서 경험한 농인 공연을 떠올리며, 한국에서도 청인의 원작 단순 번역을 넘어 농인의 다양한 예술이 창작되어 다양한 공간에서 생명력 있게 살아 움직여 농인들이 예술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갤러뎃 대학교 연극학과 공연 〈노이즈 오프〉(2010)
(출처. 갤러뎃 대학교 연극무용학과 페이스북)
데피니틀리 시어터 〈한여름밤의 꿈〉(2014)
(출처. 데피니틀리 시어터 페이스북)

조희경
수어 번역·감수자. 제1 언어로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으로, 나사렛대 외래교수로 수어·농문화를 강의하고 있다. 한국수어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수어 통역·번역·감수 전문가로 다양한 교육과 자문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리움미술관 〈감각 너머 2024〉 국제수어 통역, 누비스 〈창작연극 오디션 워크숍〉 강의, 공연 〈침묵 속에 기록된〉 수어 지도, 〈라이트 트리스〉 접근성 자문 등 공연뿐 아니라 박물관과 전시의 농인 접근성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chohik@hanmail.net
사진 제공.필자
2026년 2월 (72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제공하는 자료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 4유형 : 출처표시,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의 조건에 따라 이용이 가능합니다.
댓글 남기기
이전글 보기
다음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