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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상홍 배우·연출가 나만의 예술세계를 찾아, 길을 내는 사람

  • 이소선 이야기공방 마음담기 대표
  • 등록일 2025-02-26
  • 조회수 31

인터뷰

배우이자 연출가로 활동 중인 김상홍 선생은 제주에서 장애예술을 시작한 연극인 1세대로, 30년 넘게 연극계에서 다양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인터뷰이로 김상홍 선생을 만났을 때, ‘배우님’과 ‘연출님’을 비롯한 몇 가지 호칭을 두고 고민하다 문득 ‘선생님’이라고 불러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제주로 이주하여 활동한 지 10년 차가 된 필자가 겪어보지 않은 지역 연극계를 ‘먼저(先) 살아낸(生) 사람(人)’. 길이 없던 시절에, 길을 만들어내서라도 걸으며 자기만의 예술을 찾아온 김상홍 선생의 삶 면면을 들여다보았다.

  • 양옆에 유리문과 벽돌벽의 복도에 휠체어를 탄 김상홍 배우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예술공간 이아 복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상홍 배우

선생님, 소개를 먼저 부탁드린다.

올해 59살이 된, 제주도 토박이 예술가다. 제주에서 30여 년간 연극을 하고 있고, 지금은 배우이자 마임이스트로 활동 중이다.

‘제주에 사는 예술가’라서 갖고 있는 특징이나 정체성이 있으신가?

제주에는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들 하잖나. 육지보다 땅도 척박하다. 자립심을 갖고 독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어려운 곳이다. 내가 어릴 땐 더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언가 한 분야에서 특출나게 잘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지역마다 인재들이 많겠지만 특히 제주도 장애인들이 운동이든 공부든 참 잘한다. 다들 재능도 많다. 그 사이에서 나 역시 나만의 것을 찾아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뭐든 연극과 관련된 것은 열심히 배우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했다.

말씀하신 ‘나만의 것’을 연극으로 삼고, 30년간 지역에서 작업을 해오셨다. 연극을 선택한 이유, 처음 연극과 인연이 닿았을 순간이 궁금하다.

어릴 때 집에 늘 혼자 있었다. 부모님은 밭에서 김을 매고, 형이랑 누나들이 학교에 가면 혼자 남아 마당에 앉아 있었다. 하루는 비가 오는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 빗방울이 처마 밑에 놓인 양푼 대야에 똑, 똑 떨어지는 소리가 어찌나 처량하던지. 근데 또 묘하게 기분이 좋더라. 조금 커서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유행가를 들으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그러다 어느 날 마을에 TV가 딱 한 대 들어왔다. 거기서 드라마며 영화 같은 걸 보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다. ‘주말의 명화’나 〈태양은 가득히〉 같은 것들이다. 흑백 TV였지만 지금도 그 이미지가 선명하다. 그걸 보면서 문득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라는 게, 뭐랄까 참 막연하잖나. 그래서 그냥 ‘잊어버리자, 내가 무슨 배우를 하겠냐’ 싶었다. 그렇게 당연하게 마음을 접었다가 20대 초반에 우연히 만난 학교 선배가 어느 날 연극 보러 오라고 티켓을 주더라. 티켓을 받는 순간 물어봤다. “선배, 혹시 저도 배우 할 수 있을까요?” 그랬더니 극단 대표님한테 물어봐 주겠다더라. 그때부터 제주에 있던 극단들을 무조건 찾아갔고, 연극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막연했던 꿈이 현실에서 가능성으로 다가올 때의 설렘과 흥분이 있으셨겠다.

그랬다. 무조건 찾아갔다고는 했지만, 분명히 ‘단원 모집’이라고 쓰인 전단을 보고 찾아갔었던 거다. 이제 뭘 좀 해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애써 찾아간 나를 향한 반응이 한결같아서 당황했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아, 마침 우린 단원이 다 찼어요.” “실은 여자 단원이 필요한 거라서요.” 같은 말로 거절하는데, 속이 다 보이는 핑계라 마음이 안 좋더라. 몇 번 퇴짜를 맞다가 안되겠어서 그 당시에 여러 가지 파격적인 시도를 통해 독특한 행보를 보이던 ‘극단 무’에 무작정 가서, 뭐라도 하겠다고 했다. 그 극단에서 하는 연극 교실에 수강생으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연극 교실을 다니며 어느 정도 배워서 이제 연극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바로 뭐가 되지는 않더라. 음향이든 분장이든 연기든, 보조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림자 취급받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또 무조건 들이밀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휠체어를 타고 매일 같이 먼 거리에 있는 극장까지 찾아가 뭐든 배우고 도왔다. 그런 열정을 좋게 보셨는지 조금씩 일을 얻었고, 차차 인정도 받게 되었다. 그때 같이 일했던 분들과 지금까지 선후배로 지내고 있다.

기대한 만큼 일을 할 수 없었고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도 작업을 계속 이어가셨다. 계속 연극을 하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처음 연극 교실이 끝나고 나서 작품을 하나 올렸는데, 공연을 마치고 나서 팸플릿에 다 같이 롤링페이퍼를 썼다. 거기에 누군가가 “김상홍 씨, 휠체어 타면서도 열심히 하는 멋진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정말 인상 깊었어요.” 이렇게 쓴 거다. 그걸 읽는 순간 ‘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계속하고 싶더라. 그 문장이 마음에 훅 와닿았다.
그렇지만 연극이 어디 쉽나. 힘들었다.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둬야지’ ‘딱 1년만 더해야지’ 이렇게 생각한 적이 많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계속하고 있더라. 제일 힘든 건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하지만 재밌는 건, 계속하게 되는 이유도 결국 사람이더라. 무대에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사람들, 같이 하는 동료들과 함께 좋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한 해, 두 해 해오던 것이 벌써 30년이 넘었다.

각자의 품과 마음을 모아야 작품이 완성된다는 측면에서 연극이 참 매력적이다. 말씀하신 대로 관계의 부침이 생기기도 하고. 창작 과정 안에서 지치거나 충전이 필요할 때는 무엇을 하시나?

순수해지는 선택을 한다. 자연으로 간다. 풀과 나무가 있는 오솔길을 가거나, 바다에 가서 음악도 듣고, 주변을 천천히 관찰한다. 사소한 것이라도 대충 훑어보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와 느낌을 충분히 보는 건 후배 예술가들에게도 자주 권하는 일이다. 가끔 예술 하는 동료들이 방황하고 술 마시면서 삶에 찌든 사람들하고 만나는 경우를 보는데,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자라, 잠든 꿈속에서 숲에 한 번 더 가라고 말한다.
아시겠지만, 장애인은 자연에 가는 것, 예를 들면 오름 같은 곳에 가기도 비장애인보다 힘들다. 접근도 어렵고, 돌멩이투성이인 곳도 많고. 그래도 동료 장애예술가들에게 계속 제안한다. 근처까지라도 가보자는 거다. 정신과 몸을 건강하게 해서 순수해지면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김상홍 배우가 인터뷰하며 미소짓고 있다.
  • 김상홍 배우가 자신의 공연 자료를 손에 들어 들여다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테이블에 다양한 공연 팸플릿이 펼쳐져 있다.

 

극단 서툰사람들의 단장으로 동료들을 이끌면서, 방금 말씀하신 자연에서의 시간처럼 동료들에게 제안하는 중요한 신념 또는 원칙이 있나?

제일 중요한 건 약속이다. 무슨 일이든 약속을 지키자. 남들과의 약속은 당연한 거고, 나 자신과의 약속도 잘 지키자는 거다. 그리고 옷차림과 얼굴을 비롯한 외모 관리, 청결 등도 항상 강조한다. 겉모습도 잘 꾸며보고, 문화생활도 더 열심히 하면서 자신을 가꾸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되더라. 이건 자기를 사랑하는 일과도 연결되니까.
이 자리를 빌려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도 전문 예술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무언가를 해보자는 거다. 예를 들어 연극을 직업으로 삼는 비장애예술가들은 공연 날짜가 잡히면 자기의 모든 걸 다 쏟아부으며 창작하잖나. 그런데 장애예술가들의 경우 창작 작업이 삶에서 후순위일 때가 많더라. 집안일이 있다거나, 복지관이나 협회 같은 곳에서 무슨 행사가 있다거나, 어디 교육을 받으러 간다거나, 이것저것 본인의 다른 일을 우선으로 하고, 연습을 그다음으로 둘 때 안타까운 마음이다. 우리가 하는 예술이 취미로 하는 동호회가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마음가짐으로 꾸려가는 작업이라는 걸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태도를 갖추었으면 한다.

긴 시간 개인 예술가로, 또 한 단체를 이끄는 리더로서 활동을 다양하게 해오셨는데, 올해는 연극을 잠시 멈추고 다른 계획이 있다고 들었다.

어릴 때 집에서 심심하게 놀고 있다가 형님이 만화책 한 권 가져오면 그것을 따라 그리면서 놀았다. 하다 보니까 그림 그리는 게 재밌고, 재능도 있더라. 학교 다닐 땐 미술부를 했고, 꽤 진지하게 그렸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미술은 외로움과의 싸움이고 자신과의 싸움이더라. 10대 후반에 그 싸움에서 져서 붓을 놔버렸다. 아마 그때 그림을 놓았던 걸 연극으로 채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근데 40년 만에 다시 해보고 싶어졌다. 올해는 연극을 좀 쉬고, 그림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40년 동안 들지 않으셨던 붓을 다시 들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궁금하다.

계기는 없었고, 전보다 마음의 여유가 좀 생겼다. ‘그래 한번 해보지, 뭐’ 이런 생각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져서 붓을 놓았는데, 지금은 ‘까짓거 지면 어때, 질 수도 있지 뭐’ 이런 생각이 들더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생각한 것만큼 안 될 수도 있지만, 해보려고 한다.

말씀을 들으니 긴 세월 지역의 연극 예술가로 활동해 온 삶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 뻔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꿈을 여쭙고 싶다.

어릴 땐 이 질문이 참 어려웠다. 당연히 직업을 묻는 말이었으니까. 장애인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으니 좁은 기준을 세워놓고 거기에서 뭐라고 말해야 덜 핀잔받을까 고민해야 했다. 지금은 하고 싶은 게 참 많다. 올해 연극을 잠시 쉰다고는 했지만, 언젠가 배우로서 중앙무대에도 서보고 싶고, 좋은 작품도 계속하고 싶다. 장애예술가든 비장애예술가든 각자 마음속 꿈이 다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을 꼭 해보고 싶다. 늘, 이 ‘나만의 것’이 중요했던 것 같다. 지금도 계속 그것을 찾아가는 중이다.

***

인터뷰 내내, 열정적인 김상홍 선생의 모습에 처마 끝에 내리는 빗방울을 보던 50년 전의 작은 소년이 겹쳐 보였다. 긴 시간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내는 예술가가 되며 느꼈을 외로움과 호젓함이 그의 표정에 얼핏 드러나기도 했다. 그 길 위에서 스스로 돌보고 알아차려 온 시간이, 함께 걸어온 동료들과 쌓아온 경험이, 김상홍 선생의 무대 위에서 계속 피어나기를 바란다.

  • 무대에서 김상홍 배우가 반짝이는 의상을 입고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한 채 한 팔을 내밀고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본다.

    극단 서툰사람들, 뮤지컬 〈런웨이〉, 2019

  • 휠체어를 탄 김상홍 배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향해 있고, 옆에 선 여배우도 심각한 표정으로 김상홍 배우를 바라보고 있다.

    극단 서툰사람들, 〈각시붓꽃〉, 2024

김상홍

김상홍

마임이스트, 배우, 연출가. 1991년 연극계에 입문한 제주 1세대 연극인으로 조명, 분장, 무대설치, 조연출 등 30여 년 경험 쌓아 배우,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9년 장애인극단 서툰사람들에 합류해 단장으로 활동했다. 〈서툰 사람들〉(장진 작, 2009) 연출을 시작으로 연출 및 출연작으로 전국장애인연극제에서 올린 〈사랑이 지나가면〉(2010), 〈사랑이 지나가면 2〉(2013), 〈꿈을 찾는 사람들〉(2014), 〈여긴어디? 나는누구?〉(2015), 〈목마른 남자〉(2016, 2019), 〈각시붓꽃〉(공동연출, 2024) 등이 있다. 창작 뮤지컬 〈딜레마〉(2017)에 출연 및 조연출로 참여했고, 극단 아이엠 창단공연 〈수상한 꿈〉(2022)과 〈출입금지〉(2023)를 연출하고 출연했다. 영화 〈복지식당〉(2022)에도 출연했다.
tkdghd0728@naver.com

이소선

이소선

문화예술교육가, 이야기공방 마음담기 대표. 어린이, 청소년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며 그들에게 놀이와 이야기를 돌려주는 일을 한다. 해질녘의 하늘과 산책, 그림책을 좋아하고 삶의 면면에 닿아있는 다양한 인연 사이에서 연대감과 다정함을 중요한 가치로 두고 활동하고 있다. 제주살이 10년 차, 지금 살고 있는 지역과 이미 떠나온 지역, 아직 살아보지 않은 지역을 넘나들며 예술교육 안의 ‘연결하기’를 시도 중이다.
sosun0818@gmail.com

사진.전진호 사진작가 0162729624@hanmail.net

2025년 3월 (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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