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큐레이션

김범진 배우

인터뷰 무대를 온전히 책임지는 배우가 되고 싶다

  • 김소연 연극평론가
  • 등록일 2022-08-24
  • 조회수2402

인터뷰를 다 마친 후였다. 영상을 찍고 있던 박유미 작가가 카메라를 켜둔 채로 앞으로 하고 싶은 역할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리처드 3세!”라고 답했다. 아뿔싸!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놓칠 뻔하다니! 셰익스피어에 의해 창조된 리처드 3세는 형을 암살하고 수많은 정적을 숙청하고 조카를 살해하여 권력을 거머쥐는, 잔학과 음모의 화신이다. 결국 몰락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을 향해 돌진하는 리처드 3세에 관객들은 매료된다. 이에 대해 연극학자 강태경은 ‘인간 존재의 자기 결정성’ 의 속도와 에너지라고 말했다. 게다가 등이 휘고 절뚝거리며 걷는다. 바로 이 역할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 김범진은 배우, 욕심 많은 배우다.

그러고 보면 김범진이 무대 위에서 보여주었던 역할들은 강렬했다. 그가 배우로 데뷔해서 활동해온 극단 여행자의 활달한 양식성은 신체극을 방불케 하는 배우의 움직임 연기에서 비롯되는데, 그 역시도 여행자의 배우인 것이다. 그의 데뷔 무대였던 <페리클레스>(2015)는 페리클레스의 모험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악당 ‘볼트’ 등 여러 역할로 등장하면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캐릭터도 강렬할뿐더러 저신장이라는 신체 조건에 대한 통념적 캐릭터에 머물지 않고, 모래를 깐 무대 바닥을 다른 배우들과 함께 뛰고 구르면서 여행자의 연극을 만들어냈다. 그는 극단 여행자가 어떤 연극을 만드는 곳인지도 모르고 입단했다지만, 그도 스스로 자부하는 신체 연기와 극단 여행자의 활달한 양식은 궁합이 잘 맞는다. 그는 극단 여행자 외에도 현대무용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안은미 컴퍼니 <대심(大心)땐쓰>(2017), <나는 스무 살입니다>(2020), 리케이댄스 <복(bOK)>(2022) 등 현대무용 작품에서 댄서로 서기도 했다. 그 외에도 드라마, 영화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이제 데뷔 7년 차 배우로서는 성공적인 데뷔기를 지나고 있다 할 것이다.

연극만 생각하고, 연극만 한, 연극쟁이

학교를 다니다가 극단 여행자에 들어가고, 들어가자마자 <페리클레스>에 캐스팅되고 이후 극단 여행자 외에도 작품이 쭉 이어지고 있다. 화려한 입문기다. 많은 배우가 입문기에 방황도 하고 고민도 하며 수련기랄까, 무대에 직접 서지 못한 채로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배우로 입문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소년연극대회도 나가고 똑 떨어지고 그랬다. 그냥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자고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대학로에서 공연을 봤는데 재미있었다. 마침 고3 입시생이었고 그럼 대학을 연영과로 준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미 수시가 시작된 때였는데, 연기과 입시학원을 알아보는 게 쉽지 않았다. 학원마다 퇴짜였다. 진학률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입시를 통과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여러 곳을 알아보다가 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선생님들도 수업도 너무 좋았다. 그러면서 입시에 오기도 생기고, 한번 해보자고 마음도 다잡았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다. 입학 후에는 방황도 고민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창피한데, 진지하게 연극만 생각했다. 학기 중에도 공연하고 방학 때도 공연하고.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다 해냈다. 공연을 해야 돼, 나는 쉬면 안 돼, 그랬다. 그러면서 연극이 점점 더 재밌어졌고 자연스럽게 배우가 되어야지 했던 것 같다.

근데 진지하게 연극만 생각하면서 열심히 한 게 왜 창피한가.

너무 연극쟁이라서. (웃음) 작업 끝나고 나면 밤새 술 마시고, 아침에 수업이 있으니까 아예 연습실에서 자곤 했다.

학교를 24시간 다녔던 것 같다. (웃음) 특히 기억에 남는 수업이 있나. 어려움은 없었나. 제작에 들어가면 여러 역할을 맡아야 했을 텐데.

‘거짓말하기’가 기억에 남는다. 한 사람씩 나와서 마치 자기가 직접 경험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다. 내 이야기를 믿어줄까 싶었는데, 말하는 나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차올랐다. 연기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다. ‘거짓말’의 힘이랄까 그런 걸 알게 되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수업의 일환으로 조명, 무대 제작 설치 등도 배우는데 내가 할 수 없는 게 많았다. 할 수 없는 일은 인정하고 내 할 일을 찾아 하고 그랬다. 무대 설치나 철거할 때 조명을 달거나 떼는 건 어려우니까 주로 바닥을 맡았다. 못 박고 줍고. 내 조건에 맞게 공동작업에 참여했다.

학업 중에 극단 여행자에 들어갔다. 어떻게 그렇게 이어졌나. 단원 선발 오디션이 어렵진 않았나.

막연하고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계속 공연 기회가 있었지만, 학교 밖에서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으면 어쩌지, 그런 불안감이 마치 밀린 숙제처럼 다가왔다. 마침 그때 극단 여행자와 작업을 하고 있던 김세한 작가가 오디션이 있다고 알려줬다. 학교가 지방이고, 학교 안에만 있어서 연극계를 잘 몰랐다. 극단 여행자도 몰랐다. 아, 이거 나가면 극단 사람들이 안 좋아할 텐데. (웃음) 나중에 극단 들어가고 나서 주변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오디션은 <벚꽃동산>의 로빠힌 역, 노래, 춤을 준비했다. 연기는 좀 자신이 없었는데, 춤을 추니까 양정웅 연출과 이대웅 연출이 몸을 잘 움직인다고 했다. 워낙 춤을 좋아하기도 했고, 학교 다닐 때는 신체 훈련 수업을 하셨던 선생님 공연에 참여한 적도 있다.

극단에 막 들어간 해에 <페리클레스>로 데뷔했다. 첫 무대다.

처음에는 따로 배역도 없었고, 대본 읽기를 오래 했다. 배역 없이 대본 읽고 장면 만들고 그랬다. 즉흥을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 여행자만의 신체 연기랄까 그런 걸 압축적으로 배웠던 것 같다. 무대 전체에 모래가 깔려있어서 체력이 엄청 필요했다. 연습 외에도 배우들끼리 따로 운동도 많이 했다. 선배들이 무서웠다. (웃음) 뭐라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선배들은 많은 무대에 섰고 또 여행자만의 신체 연기로 작업해온 시간이 있으니 우리가 답답했을 거다. 그리고 무대에서의 예민함을 좀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공연 들어가면 서로 예민해지는데, 프로들이 예민한 건 차원이 달랐다.

기회가 오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했다고 했는데, 데뷔 때부터 기회가 계속 이어지는 것 같다. 비법이 있나.

그런 건 없다. 따로 오디션을 보러 다닌 건 아니고 안무나 연출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건 내 생각인데, 배우는 신비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연출가, 안무가와 작업해왔지만, 사적으로 친해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야 계속 작업을 하고 싶을 테고 너무 다 알면 재미없을 것 같다. 더 잘 이해하게 될 수도 있지만, 편견이 생길 수도 있다. 서로에 대한 거리감, 낯섦이 창작과정에 필요한 긴장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나인프리다>에 참여했고, 올해 <합★체>를 준비하고 있다. 극단 여행자도 그렇고 외부 작업도 비장애인 프로덕션에서 활동하다가 최근 장애 예술가들과 작업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점이 있나?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배우들 각자의 장애를 공유한다는 거다. 각자 안 되는 부분, 힘든 부분을 서로 공유한다. 비장애 배우들과는 그런 과정이 없다. 서로의 장애를 공유하면서 굳이 안 되는 걸 극복해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표현을 찾아가려고 노력한다.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창작한다는 뜻이 아니다. 장애·비장애를 떠나,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갇히면 자신의 연기에도 그리고 작품 전체에도 어려움이 크다. 그리고 활동 반경이 넓어지는 것이니까,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고, 그런 것들에서 새로운 목표가 생기는 것 같다. 그러니 더 열심히 해야지 한다.

좀 상투적인 질문일 수도 있는데, 배우로서 자신의 작업 중에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무엇인가? 대표작이라거나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라기보다는 배우로서 제일 사랑하는 역할을 꼽는다면?

<페리클레스>다. 첫 작품이기도 하고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경험을 했다. 내가 했던 작업은 다 기억에 남는다. 또 하나를 꼽자면 <나는 성군이다>의 세종 역할이다. 주인공으로서 공연 전체를 이끌고 가야 하는 역할이었다. 작은 배역은 없다고 하지만, 달랐다. 작은 배역일 때는 나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잘할까 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주인공이 처음이라 힘들었지만 전체를 생각하면서 몰입하고 만들어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오래오래, 백발이 되어서도, 배우로 일하고 싶다

지금까지 연극에 입문하고 성장해온 이야기를 들었다. 따로 질문하지 않더라도 김범진이라는 배우의 고유한 과정에서 ‘저신장’이라는 신체적 특징이 묻어날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나의 장애를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나다. 장애 때문에 어려운 것도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잘하려고 한다. 장애가 있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그런 건 아니다. 그런 강박은 배우에게 치명적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잘하기 위해 훈련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저신장 장애의 경우 연골이나 허리가 안 좋다. 나는 오래 연기하고 싶다. 그래서 스트레칭이나 기본적인 근육 운동을 따로 한다. 근육을 키워야 뼈가 휘는 것을 잡아준다. 무용공연을 계속하는 것도 춤추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용을 하면서 내 몸을 더 잘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기 몸을 알아야 하고, 몸을 쓸 줄 알아야 하고, 체력도 좋아야 한다. 그걸 항상 준비하는 거다. 공연은 최대한 기회가 생기면 많이 하려고 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올려다보는 시선이다. 그것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장점이자 단점이다. 무대에서건 일상에서건 나는 주목을 많이 받는다. 나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거다. 장점은 관객이 나를 봐주고 몰입해준다는 거고, 단점은 결국 내가 해낸 것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거다. 그래서 무대에서 내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것이 있다. 첫 등장이 중요한데, 그때 관객에게 신뢰를 얻어야 한다. 공연의 ‘인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계획은?

배우를 오래 하고 싶다. 백발이 되어서도 배우로 활동하고 싶다. 그래서 스트레칭과 근육 운동을 열심히 한다.

김범진 배우만이 아니라 장애를 가지고 있는 배우들의 활동도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장애인이건 혹은 스스로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중에 배우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면 어떤 조언을 하고 싶은가?

나도 사실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테이프’라는 재료도 처음 사용해봤으니까. 그런데 예전 자료를 정리하면서 보니, 20년 전에 했던 작품과 20년 후에 발표한 테이핑 설치와 사진의 느낌이 같았다. 아, 도구만 달라졌구나, 그때 깨달았다. 내 작업은 예나 지금이나 내 삶이 투영되어 있다. 작품 <패스파인더(pathfinder)>에는 내가 빛을 따라 개척해온 길, 20년 동안 겪은 인생의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바람이 채워지면 팽팽해졌다가 빠지면 수축하는 커다란 비치볼 위의 라인들도 내 인생길을 닮았다. 그런 표현이 그냥 저절로 나온 것 같다. 이후 다른 갤러리에서 전시했던 <리플렉션(reflection)>의 경우, 유리 벽면 가득 반복적인 패턴의 반투명 시트지를 설치했는데 작품의 패턴 때문에 유리벽 너머에 보이는 풍경이 분절되고 중첩되고 반복됐다. 나는 그게 나와 타인의 관계처럼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투영되기도 하고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때론 단절되기도 하지 않나. 검은 실을 천장부터 커튼처럼 드리운 작품 <언타이틀드(untitled)>(2020)는 그 자체가 나에게 빛이었다. 무엇보다도 눈부신 빛. 내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빛이 작품으로 표현된 거다.

접근은 쉽지만 활동은 쉽지 않다.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자신의 결함이나 단점에 얽매이지 않고 작업에 매진할 수 있다면, 매력적인 직업이다. 하지만 되게 힘들다. 억지로 하지는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

너무 매력적이지만 쉽지 않다, 그렇게 말하니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야기 감사하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무리하려고 할 때 박유미 작가가 물었다)앞으로 하고 싶은 역할은?

리처드 3세!

  • 2021 무장애예술주간 기획공연 <나인프리다>
    사진 제공.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촬영. 박수환)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극창작플랫폼 한일공동연출프로젝트
    <어느 마을>(2021) 사진 제공.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창작플랫폼

김범진

배우. 극단 여행자 단원으로 배우 및 퍼포머로 연극, 현대무용, 영화,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며 자신만의 시선과 움직임, 다양한 장르와 역할을 선보이고 있다. 출연작으로는 연극 <페리클레스> <나는 성군이다> <드라곤 킹> <어느 마을> <나인프리다>, 현대무용 <대심(大心)땐쓰> <나는 스무살입니다> <복(bOK)>, 영화 <테우리> <더 박스> 등이 있다.
amrmfkdld@hanmail.net

김소연

연극평론가. <문화정책리뷰> 편집장. 공연보고 글을 쓴다. 글 쓰는 것 외에 관객과 창작자가 만나는 다양한 방식을 궁리하고 실행한다. <삼인삼색 연출노트> <극작가리서치워크숍> 등을 기획했다.
인스타그램 바로가기(링크)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 gomako1983@daum.net
사진. 복세욱 ricky76kr@naver.com

2022년 9월 (34호)

김소연

김소연 



필자 블로그 바로가기 : https://www.instagram.com/sweetdream514/

상세내용

인터뷰를 다 마친 후였다. 영상을 찍고 있던 박유미 작가가 카메라를 켜둔 채로 앞으로 하고 싶은 역할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리처드 3세!”라고 답했다. 아뿔싸!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놓칠 뻔하다니! 셰익스피어에 의해 창조된 리처드 3세는 형을 암살하고 수많은 정적을 숙청하고 조카를 살해하여 권력을 거머쥐는, 잔학과 음모의 화신이다. 결국 몰락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을 향해 돌진하는 리처드 3세에 관객들은 매료된다. 이에 대해 연극학자 강태경은 ‘인간 존재의 자기 결정성’ 의 속도와 에너지라고 말했다. 게다가 등이 휘고 절뚝거리며 걷는다. 바로 이 역할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 김범진은 배우, 욕심 많은 배우다.

그러고 보면 김범진이 무대 위에서 보여주었던 역할들은 강렬했다. 그가 배우로 데뷔해서 활동해온 극단 여행자의 활달한 양식성은 신체극을 방불케 하는 배우의 움직임 연기에서 비롯되는데, 그 역시도 여행자의 배우인 것이다. 그의 데뷔 무대였던 <페리클레스>(2015)는 페리클레스의 모험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악당 ‘볼트’ 등 여러 역할로 등장하면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캐릭터도 강렬할뿐더러 저신장이라는 신체 조건에 대한 통념적 캐릭터에 머물지 않고, 모래를 깐 무대 바닥을 다른 배우들과 함께 뛰고 구르면서 여행자의 연극을 만들어냈다. 그는 극단 여행자가 어떤 연극을 만드는 곳인지도 모르고 입단했다지만, 그도 스스로 자부하는 신체 연기와 극단 여행자의 활달한 양식은 궁합이 잘 맞는다. 그는 극단 여행자 외에도 현대무용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안은미 컴퍼니 <대심(大心)땐쓰>(2017), <나는 스무 살입니다>(2020), 리케이댄스 <복(bOK)>(2022) 등 현대무용 작품에서 댄서로 서기도 했다. 그 외에도 드라마, 영화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이제 데뷔 7년 차 배우로서는 성공적인 데뷔기를 지나고 있다 할 것이다.

연극만 생각하고, 연극만 한, 연극쟁이

학교를 다니다가 극단 여행자에 들어가고, 들어가자마자 <페리클레스>에 캐스팅되고 이후 극단 여행자 외에도 작품이 쭉 이어지고 있다. 화려한 입문기다. 많은 배우가 입문기에 방황도 하고 고민도 하며 수련기랄까, 무대에 직접 서지 못한 채로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배우로 입문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소년연극대회도 나가고 똑 떨어지고 그랬다. 그냥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자고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대학로에서 공연을 봤는데 재미있었다. 마침 고3 입시생이었고 그럼 대학을 연영과로 준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미 수시가 시작된 때였는데, 연기과 입시학원을 알아보는 게 쉽지 않았다. 학원마다 퇴짜였다. 진학률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입시를 통과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여러 곳을 알아보다가 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선생님들도 수업도 너무 좋았다. 그러면서 입시에 오기도 생기고, 한번 해보자고 마음도 다잡았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다. 입학 후에는 방황도 고민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창피한데, 진지하게 연극만 생각했다. 학기 중에도 공연하고 방학 때도 공연하고.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다 해냈다. 공연을 해야 돼, 나는 쉬면 안 돼, 그랬다. 그러면서 연극이 점점 더 재밌어졌고 자연스럽게 배우가 되어야지 했던 것 같다.

근데 진지하게 연극만 생각하면서 열심히 한 게 왜 창피한가.

너무 연극쟁이라서. (웃음) 작업 끝나고 나면 밤새 술 마시고, 아침에 수업이 있으니까 아예 연습실에서 자곤 했다.

학교를 24시간 다녔던 것 같다. (웃음) 특히 기억에 남는 수업이 있나. 어려움은 없었나. 제작에 들어가면 여러 역할을 맡아야 했을 텐데.

‘거짓말하기’가 기억에 남는다. 한 사람씩 나와서 마치 자기가 직접 경험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다. 내 이야기를 믿어줄까 싶었는데, 말하는 나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차올랐다. 연기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다. ‘거짓말’의 힘이랄까 그런 걸 알게 되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수업의 일환으로 조명, 무대 제작 설치 등도 배우는데 내가 할 수 없는 게 많았다. 할 수 없는 일은 인정하고 내 할 일을 찾아 하고 그랬다. 무대 설치나 철거할 때 조명을 달거나 떼는 건 어려우니까 주로 바닥을 맡았다. 못 박고 줍고. 내 조건에 맞게 공동작업에 참여했다.

학업 중에 극단 여행자에 들어갔다. 어떻게 그렇게 이어졌나. 단원 선발 오디션이 어렵진 않았나.

막연하고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계속 공연 기회가 있었지만, 학교 밖에서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으면 어쩌지, 그런 불안감이 마치 밀린 숙제처럼 다가왔다. 마침 그때 극단 여행자와 작업을 하고 있던 김세한 작가가 오디션이 있다고 알려줬다. 학교가 지방이고, 학교 안에만 있어서 연극계를 잘 몰랐다. 극단 여행자도 몰랐다. 아, 이거 나가면 극단 사람들이 안 좋아할 텐데. (웃음) 나중에 극단 들어가고 나서 주변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오디션은 <벚꽃동산>의 로빠힌 역, 노래, 춤을 준비했다. 연기는 좀 자신이 없었는데, 춤을 추니까 양정웅 연출과 이대웅 연출이 몸을 잘 움직인다고 했다. 워낙 춤을 좋아하기도 했고, 학교 다닐 때는 신체 훈련 수업을 하셨던 선생님 공연에 참여한 적도 있다.

극단에 막 들어간 해에 <페리클레스>로 데뷔했다. 첫 무대다.

처음에는 따로 배역도 없었고, 대본 읽기를 오래 했다. 배역 없이 대본 읽고 장면 만들고 그랬다. 즉흥을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 여행자만의 신체 연기랄까 그런 걸 압축적으로 배웠던 것 같다. 무대 전체에 모래가 깔려있어서 체력이 엄청 필요했다. 연습 외에도 배우들끼리 따로 운동도 많이 했다. 선배들이 무서웠다. (웃음) 뭐라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선배들은 많은 무대에 섰고 또 여행자만의 신체 연기로 작업해온 시간이 있으니 우리가 답답했을 거다. 그리고 무대에서의 예민함을 좀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공연 들어가면 서로 예민해지는데, 프로들이 예민한 건 차원이 달랐다.

기회가 오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했다고 했는데, 데뷔 때부터 기회가 계속 이어지는 것 같다. 비법이 있나.

그런 건 없다. 따로 오디션을 보러 다닌 건 아니고 안무나 연출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건 내 생각인데, 배우는 신비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연출가, 안무가와 작업해왔지만, 사적으로 친해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야 계속 작업을 하고 싶을 테고 너무 다 알면 재미없을 것 같다. 더 잘 이해하게 될 수도 있지만, 편견이 생길 수도 있다. 서로에 대한 거리감, 낯섦이 창작과정에 필요한 긴장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나인프리다>에 참여했고, 올해 <합★체>를 준비하고 있다. 극단 여행자도 그렇고 외부 작업도 비장애인 프로덕션에서 활동하다가 최근 장애 예술가들과 작업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점이 있나?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배우들 각자의 장애를 공유한다는 거다. 각자 안 되는 부분, 힘든 부분을 서로 공유한다. 비장애 배우들과는 그런 과정이 없다. 서로의 장애를 공유하면서 굳이 안 되는 걸 극복해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표현을 찾아가려고 노력한다.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창작한다는 뜻이 아니다. 장애·비장애를 떠나,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갇히면 자신의 연기에도 그리고 작품 전체에도 어려움이 크다. 그리고 활동 반경이 넓어지는 것이니까,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고, 그런 것들에서 새로운 목표가 생기는 것 같다. 그러니 더 열심히 해야지 한다.

좀 상투적인 질문일 수도 있는데, 배우로서 자신의 작업 중에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무엇인가? 대표작이라거나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라기보다는 배우로서 제일 사랑하는 역할을 꼽는다면?

<페리클레스>다. 첫 작품이기도 하고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경험을 했다. 내가 했던 작업은 다 기억에 남는다. 또 하나를 꼽자면 <나는 성군이다>의 세종 역할이다. 주인공으로서 공연 전체를 이끌고 가야 하는 역할이었다. 작은 배역은 없다고 하지만, 달랐다. 작은 배역일 때는 나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잘할까 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주인공이 처음이라 힘들었지만 전체를 생각하면서 몰입하고 만들어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오래오래, 백발이 되어서도, 배우로 일하고 싶다

지금까지 연극에 입문하고 성장해온 이야기를 들었다. 따로 질문하지 않더라도 김범진이라는 배우의 고유한 과정에서 ‘저신장’이라는 신체적 특징이 묻어날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나의 장애를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나다. 장애 때문에 어려운 것도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잘하려고 한다. 장애가 있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그런 건 아니다. 그런 강박은 배우에게 치명적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잘하기 위해 훈련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저신장 장애의 경우 연골이나 허리가 안 좋다. 나는 오래 연기하고 싶다. 그래서 스트레칭이나 기본적인 근육 운동을 따로 한다. 근육을 키워야 뼈가 휘는 것을 잡아준다. 무용공연을 계속하는 것도 춤추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용을 하면서 내 몸을 더 잘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기 몸을 알아야 하고, 몸을 쓸 줄 알아야 하고, 체력도 좋아야 한다. 그걸 항상 준비하는 거다. 공연은 최대한 기회가 생기면 많이 하려고 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올려다보는 시선이다. 그것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장점이자 단점이다. 무대에서건 일상에서건 나는 주목을 많이 받는다. 나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거다. 장점은 관객이 나를 봐주고 몰입해준다는 거고, 단점은 결국 내가 해낸 것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거다. 그래서 무대에서 내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것이 있다. 첫 등장이 중요한데, 그때 관객에게 신뢰를 얻어야 한다. 공연의 ‘인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계획은?

배우를 오래 하고 싶다. 백발이 되어서도 배우로 활동하고 싶다. 그래서 스트레칭과 근육 운동을 열심히 한다.

김범진 배우만이 아니라 장애를 가지고 있는 배우들의 활동도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장애인이건 혹은 스스로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중에 배우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면 어떤 조언을 하고 싶은가?

나도 사실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테이프’라는 재료도 처음 사용해봤으니까. 그런데 예전 자료를 정리하면서 보니, 20년 전에 했던 작품과 20년 후에 발표한 테이핑 설치와 사진의 느낌이 같았다. 아, 도구만 달라졌구나, 그때 깨달았다. 내 작업은 예나 지금이나 내 삶이 투영되어 있다. 작품 <패스파인더(pathfinder)>에는 내가 빛을 따라 개척해온 길, 20년 동안 겪은 인생의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바람이 채워지면 팽팽해졌다가 빠지면 수축하는 커다란 비치볼 위의 라인들도 내 인생길을 닮았다. 그런 표현이 그냥 저절로 나온 것 같다. 이후 다른 갤러리에서 전시했던 <리플렉션(reflection)>의 경우, 유리 벽면 가득 반복적인 패턴의 반투명 시트지를 설치했는데 작품의 패턴 때문에 유리벽 너머에 보이는 풍경이 분절되고 중첩되고 반복됐다. 나는 그게 나와 타인의 관계처럼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투영되기도 하고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때론 단절되기도 하지 않나. 검은 실을 천장부터 커튼처럼 드리운 작품 <언타이틀드(untitled)>(2020)는 그 자체가 나에게 빛이었다. 무엇보다도 눈부신 빛. 내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빛이 작품으로 표현된 거다.

접근은 쉽지만 활동은 쉽지 않다.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자신의 결함이나 단점에 얽매이지 않고 작업에 매진할 수 있다면, 매력적인 직업이다. 하지만 되게 힘들다. 억지로 하지는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

너무 매력적이지만 쉽지 않다, 그렇게 말하니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야기 감사하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무리하려고 할 때 박유미 작가가 물었다)앞으로 하고 싶은 역할은?

리처드 3세!

  • 2021 무장애예술주간 기획공연 <나인프리다>
    사진 제공.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촬영. 박수환)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극창작플랫폼 한일공동연출프로젝트
    <어느 마을>(2021) 사진 제공.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창작플랫폼

김범진

배우. 극단 여행자 단원으로 배우 및 퍼포머로 연극, 현대무용, 영화,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며 자신만의 시선과 움직임, 다양한 장르와 역할을 선보이고 있다. 출연작으로는 연극 <페리클레스> <나는 성군이다> <드라곤 킹> <어느 마을> <나인프리다>, 현대무용 <대심(大心)땐쓰> <나는 스무살입니다> <복(bOK)>, 영화 <테우리> <더 박스> 등이 있다.
amrmfkdld@hanmail.net

김소연

연극평론가. <문화정책리뷰> 편집장. 공연보고 글을 쓴다. 글 쓰는 것 외에 관객과 창작자가 만나는 다양한 방식을 궁리하고 실행한다. <삼인삼색 연출노트> <극작가리서치워크숍> 등을 기획했다.
인스타그램 바로가기(링크)

영상. 박유미 미술작가 gomako1983@daum.net
사진. 복세욱 ricky76kr@naver.com

2022년 9월 (34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제공하는 자료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 4유형 : 출처표시,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의 조건에 따라 이용이 가능합니다.

댓글 남기기

2022-09-25 10:07:04

비밀번호

작성하신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김범진 배우님의 강렬한 열정이 느껴지는 인터뷰였습니다. 장애 ° 비장애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서 한계를 모르고 전진해나가는 젊은 에너지를 듬뿍 받을 수 있어서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

2022-09-23 13:16:55

비밀번호

작성하신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얼마전 합체를 보고 김범진 배우에게 관심이 생겨 찾다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어떤 작품을 했는지 궁금했는데, 인터뷰가 있었군요. 리처드 3세를 연기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네요.

목록보기
제 2021-524호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WA-WEB 접근성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 | 1.업체명: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고 112 3.웹사이트:http://www.ieum.or.kr 4.유효기간:2021.05.03~2022.05.02 5.인증범위:이음 온라인 홈페이지 | 「지능정보화 기본법」 제47조제1항 및 같은 법 시행규칙 제9조제5항에 따라 위와 같이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를 발급합니다. 2021년 05월 03일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