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메타포란 훌륭한 것이다. 마음속의 ‘상상력’이라는 감각 기관을 작동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경치를 보여주고,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려주며, 경험한 적 없는 감각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고, 어려운 것을 손에 쥔 듯이 알게 해준다. 이는 우리 같은 감각장애인에게도 완벽하고 평등하게 작용한다. 여기서 모든 사람에게 풍요로운 커뮤니케이션의 문이 열린다. 이렇듯 우리는 ‘본다’. 단지 눈으로 보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생생하게 ‘신(scene)’을 획득한다. 그렇게 ‘신(scene, 풍경)’은 결코 ‘신(seen, 보이는)’이 아니다.”
- 호리코시 요시하루, 『귀로 보고 손으로 읽으면』 중
일본의 언어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호리코시 요시하루(堀越善晴)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보다’를 전용하고 있는 비시각장애인의 언어 관습을 지적한다. 가령, 그는 “아기를 봐줘” “목욕물을 봐” “냄비 좀 보고 와”라는 말에, 그저 ‘보다(see)’라는 행위만을 연결해 “응, 봤어”라고 대답한다면 상대에게 꾸중을 들을 것이라 말한다. 이 말들에서 ‘보다’는 또 하나의 메타포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적의 발단은, 그의 강연을 듣던 한 청중의 말에 있었다. “선생님, 재미있네요. 이야기 중에 ‘보다’나 ‘읽다’라는 말을 하시던데, 실은 전혀 읽지 못하시잖아요?”
호리코시의 일화를 통해 ‘보다’의 의미가 비시각장애인들에 의해 전용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듯이,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과의 대화는 ‘알다/이해하다’의 기존 의미가 재조정되어야 함을 느끼게 한다. 보지도 못하면서 ‘보다’라는 표현을 왜 자꾸 사용하느냐는 지적은, ‘그 말은 논외로 하고…’라는 판단과도 꽤 닮아있다. 이 말은 지금 오가는 이야기의 논점을 알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말하기를 중단시킬 때 강력하고도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이 말이 향하는 곳, 이제 그 발화자는 자신의 말하기를 중단 혹은 재조정하길 요구받는다.
오해하는 일: 네가 나를? 내가 너를?
〈내 얘기 좀 들어봐3〉 워크숍의 최종발표회는 참여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공연 한 편으로 갈무리될 예정이다. 최종발표회가 얼마 남지 않은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각자의 짧은 대본을 만들기 위하여 자기 이야기를 꺼내고 그것을 장면으로 시연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이야기의 주제는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아 억울했던 경험’이었다. 진행자는 먼저 자신이 겪었던 오해와 그로 인한 억울한 감정을 한 편의 일화로써 잘 매듭지어 들려주었다. 이분화된 젠더 구분에의 협소함을 지적하는 사례였다. 이 과정은 워크숍 참여자들이 각자 겪었던 불편하거나 황당하거나 혹은 상처받았던 일들을 ‘억울함’으로 감정화하고, 그 일이 일어난 배경을 사회적 구조나 관념에의 문제로 고발할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의미화를 염두에 둔 것일 테다. 그러나 이 의미화는 쉽지 않았다.
몇몇 참여자는 자신이 겪은 황당하고도 불안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그 상황을 유발했던 타인을 이상한 사람으로 지칭했다. 또한 어떤 참여자는 자신이 오해받았던 상황을 떠올리며, 이 오해가 발생한 이유도 함께 설명해주었다. 오해받은 그 시점만을 잘 추출하여 표현하면 될 일을, ‘여기서 그 말을 왜?’라는 생각이 들고 횡설수설로 들릴 법한 말마디들이었다. 그런데 이 말들은 자신을 오해한 사람이 ‘성급하게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서’라며, 자신이 받은 오해의 말끔한 원인을 덧붙이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제가 잘못한 것도 있었어요”라며 오해가 발생한 맥락을 덧붙여 설명해주었다.
‘기대한’ 담화들이 생성되지 못했다. 주제가 무색해졌다. 이 자리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던 경험과 누군가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던 경험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일을 주고-받았던 경험에는 이 자리에서 적용하고자 하는 구조적 맥락이나 관념으로는 설명 불가한 일들도 있었음을 함께 이야기했다. 기록자인 나에게는 혼돈의 장이었다. 초점화가 무용해지고 있는 듯했다. 꽤 아득해졌다. 오늘 이 시간, 잘 끝날 수 있을까? 최종발표회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대본이란 것이, 연극이라는 것이 가능할 수는 있을까?
이해하는 일: 너와 내가, 나와 너를
쉬는 시간 후 팀별로 나뉘어 대화하는 시간이 30분 남짓 주어졌다. 내가 겪은 억울한 경험을 나누고 그것을 장면으로까지 만들어보는 시간이었다. 세 개의 장면이 만들어졌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건물 내에서 들었던 “장애인은 취업하면 안 돼”라는 폭언, 학교에서 배식받던 중 신체적 마찰이 생기자 “장애인 학교로 가라”는 말과 함께 내던져졌던 몸, 그리고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받는 과정에서 들었던 “장애인은 집에만 있지”라는 폭언 등에 집중한 장면들이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나누는 과정에서 이렇게 ‘장면‘들이 만들어졌다. 정말 ‘장면(scene)’이었다. 초점화되어야 했던 순간들. 흐르는 삶 속에서 ‘어떤 일’을 장면으로 추출한다는 것은, 내가 겪은 그 일을 이야기할 맥락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할 맥락을 찾아냈다. 세 장면에서 발화되는 폭언들은 한결같이 상대를 ‘장애인’으로만 호명하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이들이 초점화한 억울함은 장애 정체성을 기반으로 설명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점화가 가능했던 것은 ‘대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라셰드는 찰스 테일러를 아래처럼 인용한다.
“우리는 여전히 오직 넓은 의미에서의 대화를 통해서만 새로운 언어를 다듬을 수 있다. 즉 이 대화에서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해 어떤 공통의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타인들과 일정한 소통을 주고받음으로써만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다듬을 수 있다. 인간은 항상 독창적일 수 있고, 동시대인의 사고와 통찰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으며, 심지어 동시대인들에게 크게 오해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독창적 통찰을 이끌어내는 동력은 그 통찰이 일정한 방식으로 타인들의 언어 및 통찰과 관계 맺지 않을 경우 저지당할 것이며 결국은 내적 혼란 속에서 상실되고 말 것이다.”
- 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광기와 인정에 대한 철학적 탐구』 중
“각자의 기획을 형성하고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갈 때 사용할 수 있는 서사 혹은 대본”(라셰드, 212쪽)은 이렇게 공통의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타인들과 일정한 소통을 주고받음으로써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되기 쉬운 것이 바로 집단 정체성을 일원화하거나 단순화하는 것이다. 모든 작용이 그렇겠지만, 집단 정체성은 순기능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중요했다. 한 참여자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 친구와 함께 지하철로 이동할 때 “장애인은 집에나 있지”라는 폭언을 들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주제에 맞추기 위해 내용을 과도하게 편집하거나 축약하지 않는다. 앞서 폭언을 내뱉었던 비장애인으로 보이는 두 명은, 그 전에 연로해 보이는 어느 탑승객에게서 “젊은이들, 불편한 사람들 앉게 자리 좀 비켜주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 장면을 보고는 생각이 많아졌다. 비장애인 중심 인프라 내에서 ‘집 밖’의 장애인은 비장애인에게 배려를 요구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사회에서 젊고 장애가 없어 보이는 외양을 가진 이들은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역할들의 격전이다. 젊음과 장애, 각각의 집단 정체성에만 집중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역할들을 초과하는 낱낱의 개인을 외면하게 된다. 실재하는 복잡성과 다양성을 ‘논외’로 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의 핵심으로 여겨왔던 많은 것들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보다는 제약할 수 있”다. 그래서 정체성은 “수정되어야 할 수도 있”(라셰드, 208쪽)는 것이기도 하다. 기실 장애 정체성에만 집중할 경우, 비장애 정체성이라는 뭉그러지고도 강력한 정체성을 존재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장애 정체성만을 부여하여 호명할 때 폭력적인 언행, 즉 앞서 참여자들이 듣게 된 폭언이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장애 정체성과 비장애 정체성 중 무엇이 먼저이고 나중인지 명확하게 밝히는 일보다 중요하게 살펴볼 것은, 둘은 ‘상응’한다는 점이다. 이 둘의 흐름을 끊어줄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날 워크숍에서 자꾸만 주제 밖으로 벗어나는 이야기, 말끔하게 구성되지 못하는 서사들은, 그간의 ‘논외’들을 점검해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주제로 집약되지 못하여 군더더기가 되었던 말을 이야기로,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간의) 이야기 아닌 이야기’로 세워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알겠어요?” 혹은 “이해했어요?”라고 확인하는 것은 꽤 무용한 일 같았다. 이야기를 주제‘로서’ 명확히 응집하는 일보다는 화제‘로써’ 주변적이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위함이다. 초점화하지 않을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조별로 30분가량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정말 서로가 겪었던 일을 ‘알게 되었’다. 억울한 일이 얼마나 잘 설명되었는지를 판가름하기보다는,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이 겪은 그 참혹한 일을 서로 간에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들이 발화한 군더더기들은, 또 다른 앎을 생성해낼 실마리이기도 했다.
이곳에 자리하는 앎은 “우리의 신념, 가치, 자아감, 합리성 개념, 인격 등과 같은 총체적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할 것을 요구하는”(라셰드, 122쪽) 확장된 개념이 되고 있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이해를 생성하는 과정이다. 어쩌면 이 이해는 오해를 수반할지도 모른다. 혹은 이해라는 상태 자체가, 오해와 구분되기 어려운 불확실한 시간을 계속 겪어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지금의 ‘알다/이해하다’라는 언어는 너무 협소하기에, 오해와 이해의 이런 혼란스러운 공존이 당연해 보이기도 하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의 언어를 ‘논외’로 만드는 그 논점들은, 비발달장애인의 앎만을 재생산하려는 그 게으름은, 자꾸만 앎을 협소하게 만든다. 우리가 ‘주로’ 이야기하는 주제들은, 그래서 너무 닮아있다. 앎은 더 넓어져야 한다.
장기영
읽고 쓴다. 공연·영화·소설·시 등을 보고, ‘봄’을 ‘읽음’으로 꿰어, 이내 ‘씀’으로까지 전개시킨다. 이 행위가 평론 혹은 연구라고는 불리지만, 실은 ‘보고 읽고 쓰는 사람’으로 불릴 때가 제일 마음 편하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에서 학생들에게 쓰고-읽고-말하고-듣기를 가르치고 있다.
kalce7@naver.com
사진 제공. 극단 북새통×플랜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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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은 넓어져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하는 글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 어쩌면 생길 수도 있는 오해도 결국 우리의 더 넓고 깊은 앎을 위해 수반되는 과정이기에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