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작년 연말에 메일을 하나 받았다. 영화 전문잡지에서 원고를 청탁하는 내용이었다. 매월 주목할만한 영화 한 편을 선정해서 다양한 비평과 인터뷰 등을 다루는데, 이번 영화는 오래전에 개봉했던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하 〈조제〉)이었다. 개봉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영화를 다시 보며 재해석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는 것에 매혹을 느꼈다. 또한 장애/인권단체가 아닌 데서 원고 청탁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라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는 욕망도 생겼다.
* 이 글에는 언급하는 영화의 전반적인 줄거리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쓰기 욕망에 가려진 시간과 속도
글쓰기 욕망에 이끌려서 원고 청탁을 수락하고 나니 비로소 원고 분량이 보였다. A4 8페이지 분량을 써야 했다. 나는 중증뇌병변장애가 있고 양손이 마비되어 일상생활에서도 활동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활동 지원을 받지 않는다. 우선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말을 그대로 글로 옮겨 적는데, 활동지원사를 통해 글을 쓴다면 지금보다 훨씬 자기검열에 시달려 한 줄도 쓰기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지금보다 장애가 더 진행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글 쓰는 속도는 상당히 느리다. 오른손의 한 손가락을 이용해 일명 독수리 타법으로 쓰기 때문이다. 보통 A4 한 페이지를 작성하려면 6시간 이상 걸린다. 글은 주로 주말에만 쓰는데 원고 분량이 8페이지라니! 나는 당장 못 쓴다고 거절의 메일을 보냈어야 했다. 하지만 보내지 않았다.
나는 당장 8페이지 분량의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쓰기 위해 〈조제〉를 몇 번이나 다시 봤다. 예전에 봤을 때는 괜찮은 영화라고 평가한 적이 있었다. 나에게 없는 조제의 당돌함이 부럽기도 했고, 솔직하게 감정 표현을 하는 그녀를 닮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다시 보니 뭔가 다른 게 보였다. 조제는 어떤 면에서는 무척 당당하기도 했지만, 파트너인 츠네오 앞에선 상황에 따라 위축되어 있었다. 특히 섹스 장면에서 조제는 상대방에게만 맞추려는 모습을 보였다. 조제에게 츠네오라는 비장애 남성은 중요한 지원 자원이었기에 그 관계에서 자신의 성적 욕구 혹은 자기 결정권을 쉽게 요구하거나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자원이 부족한 여성에게 섹스는 쾌락을 즐기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파트너와 불평등한 관계를 풀어가는 자원으로써 활용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실에서도 연인 관계의 불평등은 늘 상대방의 안위를 살피며 눈치를 보기 마련인데, 장애여성의 연애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제 역시 츠네오와의 관계에서 순간순간 움츠러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평 글을 쓰면서 조제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며 조금 더 괜찮은 장애여성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장애여성 유마의 모험에 이끌려
얼마 전, 드디어 새로운 장애여성 영화를 만났다. 히카리 감독의 〈37초〉라는 영화다. 뇌성마비장애를 가진 유마가 엄마의 과잉보호를 벗어나 주체적이고 도전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 유마 역은 실제 뇌성마비장애를 가진 가야마 메이가 캐스팅되어 장애를 과장된 연기로 표현되지 않았다. 장애 당사자들만 알 수 있는 생활 속 몸짓이 자연스럽게 보여 마치 내가 화면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공 유마는 인플루언서이자 만화가인 친구 사야카의 알려지지 않은 보조 만화작가다. 사야카의 만화 대부분이 유마의 아이디어로 그려진 그림이지만, 사야카는 이를 숨기고 유마를 이용하기 급급했다. 만화가로서의 정식 데뷔를 원했던 유마는 사야카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스스로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여러 출판사에 연락을 취해 보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결국 유마는 성인물 출판사 편집자를 만나 자신이 그린 성인물 만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편집자는 유마의 그림에서 진심이 담긴 생생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성 경험이 있는지 물었고, 당황한 유마가 경험이 없다고 말하자 경험해 보고 나서 다시 그림을 그려 찾아오라며 돌려보낸다.
이때부터 유마는 연애 혹은 성 경험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데이트 앱을 통해 여러 남성을 만나보기도 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어쩔 수 없이 유마는 조건만남 업소를 찾아가게 되고, 모텔에서 만난 성 판매 남성은 유마가 장애여성인 걸 눈치채고 당황해하며 마치 선심 쓰듯 대한다. 일방적인 애무가 불편했던 유마가 긴장한 나머지 소변 실수를 하게 되자 남성은 화들짝 놀라며 돈만 챙겨 가버린다.
사실 이 장면에서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 구매의 합법 혹은 불법 여부는 잠시 접어 두고, 만약 장애남성이었어도 이렇게 반응했을까? 장애여성인 유마는 성을 구매했지만, 동정을 받으며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사실 성을 구매해서 관계를 맺는 사이에 성적 매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나는 이 장면에서 비장애 중심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쩌면 유마가 중증장애여성이기 때문에 이 부분이 더욱더 부각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애남성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많은 영화에서 장애남성의 성적 매력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물리적·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성관계를 못 하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여성의 몸은 조금 더 엄격한 잣대로 판단되며 상대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존재로 낙인찍혀 버린다.
사실 유마에게 섹스는 단순히 성 경험 여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엄마의 과잉보호 틀을 뚫고 나올 저항의 수단이기도 했다. 유마의 엄마는 유마를 돌봄이 필요한 개체로만 인식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여성 범죄 위험성을 개인의 문제로 여기며 여성성이 강조되는 옷차림이나 화장 등은 완전히 차단한다. 이 부분에서 돌봄(남의 손)이 필요한 중증장애를 가진 여성들은 돌보는 이의 인식에 따라 삶의 취향과 방향이 좌지우지됨을 또 한 번 느꼈다. 나 역시 가족과 같이 살 때는 머리 모양을 한 번도 내 마음대로 해본 적이 없다. 돌봄 받기 편한 짧은 커트만 허용되었다.
무엇이 나를 글 쓰게 하는가
유마는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언제나 허용된 범주 안에서 살았던 유마에게 사람들은 삶의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맛보게 해준다. 유마의 엄마는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할 딸이 자신이 정해 놓은 원칙을 깨고 고정된 틀에서 자꾸만 빠져나가려고 하자 외부와 차단한다. 나 역시 처음 혈연 가족에게서 혼자 독립하고자 했을 때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지만, 이미 새로운 세상을 만났기 때문에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유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마는 필사적으로 엄마의 감시를 뚫고 가출을 강행한다. 그렇게 길을 나선 유마는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를 만들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간다.
〈조제〉 이후로 이토록 글을 쓰고 싶게 만든 영화는 없었다. 끌림에 이끌려 글을 써본 것도 오랜만이다. 영화 〈37초〉에는 아름다운 로맨스도, 장애 극복 신화도 없다. 한 장애여성의 독립적인 삶을 쟁취해 가는 여정이 있을 뿐이다. 이 모습을 묵묵히 따라가며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흔해 빠진 로맨스가 없고, 망한 섹스 이야기가 곳곳에 있으면서 유마와 함께 분노하고 창피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 글을 쓴다.
김상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비마이너] 칼럼니스트로 “ 김상희의 삐딱한 시선”을 연재하는 등 각종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차별적인 사회를 향한 저항하는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장애여성 활동가이다.
ester9079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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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읽었어요~ 영화 <37초>도 궁금하고요. ^^ 김상희 님을 글쓰게 만드는 더 멋진 도전과 모험, 얘깃거리가 많이많이 나타나길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