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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광장 시가 열어준 세계③ 흩어진 점이 모이면 언어가 되리니

  • 김학중 시인
  • 등록일 2023-11-15
  • 조회수 299

이음광장

첫 번째 문을 여는 날

작년에 대구점자도서관의 의뢰를 받아 점자 동화책 원고를 집필했다. 원고에 맞게 그림 작업까지 더해 『첫 번째 문을 여는 날』(김학중 글, 나윤지 그림)이라는 책으로 엮였다. 동화에 등장하는 귀여운 소녀는 실제 대구점자도서관의 교육 프로그램 참여자들이 모델이다. 두 명의 시각장애가 있는 소녀인데, 같은 또래로 교육받는 내내 서로 신나게 놀다가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면서 즐겁게 참가했다. 이들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는 것은 점자와 촉각으로 예술작품을 접하고 교감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자신이 다른 친구들과 다르고 그 다름으로 인해서 소통하는 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원고작업을 하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이 소녀들의 등장으로 대구점자도서관의 건조했던 실내가 갑자기 활기를 얻는 장면들이었다. 도서관에서 준 원고작업의 원천 자료에는 소녀들이 도서관에 와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일상적 모습, 프로그램에서 선생님들과 교감하고 대화하면서 자기표현을 하는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사실 처음 이 아이들이 점자도서관을 찾아왔을 때는 조금은 어두운 분위기를 띠었다. 주변에 시각장애인이 없으니 어떻게 아이를 기르고 교육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부모가 용기를 내어 점자도서관에 데려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을 떠올리며 점자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는 부모의 마음이 밝을 리는 없잖은가. 그러나 그 선택으로 인해서 부모의 마음도 밝아지고 점자도서관 선생님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첫 번째 문을 열고 아이들이 들어왔을 뿐인데 말이다.

아이들은 티 없이 천연했고, 놀라울 정도로 자존감이 높았다. 무엇보다 새롭게 배우는 것들에 자신을 활짝 열었다. 점자가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준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점자의 친구가 되어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동화에 등장하는 점자 캐릭터 ‘점점이’는 아이들과 말 그대로 친구가 된다. 어느새 도서관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교육받으러 오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가 되었다. 그것을 넘어서 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서 동화책으로 엮을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나에게 동화 원고 의뢰가 오게 된 연유다. 나 또한 원고작업을 하면서 아이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물론 아이들의 매력을 모두 담아낼 정도의 지면이 내게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 책을 제작하는 데 할애된 예산은 소액이었고 원고료와 원화제작비도 매우 적었지만, 도서관 선생님들과 소통하면서 이런 제한 속에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기 위해 애썼다. 대구에 직접 내려가 원고에 필요한 궁금한 사항들을 더 질문하면서 이 소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장애 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려고 했다. 그 결과 점자 동화책 『첫 번째 문을 여는 날』을 펴낼 수 있었다. 비매품으로 소량 제작해 많은 독자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에게 선물 같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고립된 목소리를 찾아 연결해주고

어쩌면 우리 세대에서 장애예술가가 하는 작업은 이렇게 다음 세대를 위한 작업이 아닐지 생각한다. 우리는 다음 세대의 장애예술가가 마음껏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닦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19년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리플리히 청소년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에서, 나는 관객을 향해 말한 적이 있다. “이 연주자들의 연주가 우리에게는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음을 내기 위해 이들이 연습한 시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이들에게 우리가 하지 않아야 할 말은, 그거 해봐야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대구의 깜찍한 어린 친구들은 이미 자신들의 목소리로 자기를 존중해 달라고 말하고 있었고,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음 세대의 그 목소리가 주눅 들지 않도록 옆에서 조용히 도와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은 점자를 이루는 점들처럼 처음에는 의미 없는 하나의 점으로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점들이 이루는 새로운 꿈의 질서가 스스로 발현할 때, 그것은 이 세계에 더불어 사는 다른 이들에게도 읽힐 아름다운 언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한두 개의 점을 찍으며 그 세계를 이어가고 연대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우리가 흩어져 있는 점들일지라도,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로 가까이 모이면 그렇게 점의 언어가 될 것이다.

얼마 전 카자흐스탄에 다녀왔다. 그곳에는 횡단보도마다 선글라스 그림이 있었다. 시각장애인을 의미하는 그림이었다. 거리 곳곳에서 그런 이미지를 보니 카자흐스탄이란 나라가 장애인을 배려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는 나라임이 느껴졌다. 카자흐스탄의 작은 도시 탈디코르간에서 시각장애인협회 사람들과 만나 그들에게 한국의 장애예술에 대해 강의하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감 넘치고 다른 나라 시각장애인의 삶에 기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짧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경험은 장애예술이 점으로 고립된 목소리를 찾아가고 연결하는 작업을 이어가는 것에 다름 아님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 겨울 코드와 목도리를 두른 단발머리의 소녀가 내리는 눈을 향해 한 팔을 뻗고 있다.

    『첫 번째 문을 여는 날』 책표지
    (사진. 대구점자도서관 제공)

  • 흰색 바닥에 선글라스 그림이 있는 사인보드가 놓여있다.

    카자흐스탄 거리의 시각장애인 배려 표시

김학중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창세』(문학동네, 2017), 『바닥의 소리로 여기까지』(걷는사람, 2022), 청소년 시집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창비교육, 2020), 소시집 『바탕색은 점점 예뻐진다』(스토리코스모스, 2021)가 있다. 제18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pulza23@hanmail.net

사진 제공.필자, 대구점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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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2 19:5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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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작업 중에 느끼신 점들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아이들의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매력이 느껴지는 것에 저도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흩어진 점과 점을 연결하시며 더 아름다운 우리사회가 되도록 열심히 작품 활동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지신 것 같아요!

2023-11-21 15:4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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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문을 여는 날 , 김학중 시인님의 동화책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느끼신 내용들을보니 가슴이 찌릿찌릿해지네요. 비매품이라 그런지 저도 처음보는 책이지만 꼭 보고싶어지는 책이되버렸습니다. 실제 대구점자도서관 교육프로그램 참여자가 모델이라니 옆에서 보고 느끼신 내용들이 담겨져있을것같아요. 말씀하신대로 다음 세대의 장애예술가가 마음껏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기위한 노력에 많은분들이 동참하면 좋겠습니다.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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