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다정한 시작: 경고 대신 안내하기
“자유롭게 출입 가능합니다” “참여하고 싶으면 마음껏 함께 해주세요” “자리를 이동하셔도 됩니다”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말 같다. 출입도, 참여도, 이동도 가능한 곳에서, 관객은 관객일 수 있는 걸까. 〈내 얘기 좀 들어봐3〉의 마지막은 관객과 공연자를 명백히 나누던 기존의 세계에 반향함을 표지했다. 수많은 관람안내문과 트리거 워닝(Trigger warning,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경고)을 마주한 후에야 들어설 수 있는 공연장들이 떠오른다. 지난 10월 7일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예술가의집’에서 마주한 이 친절한 안내 문구들은, 경고와 통제 대신 다른 몸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올해 7월부터 석 달간 진행된 〈내 얘기 좀 들어봐3〉는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성인 참여자들의 연극 만들기 워크숍이다. 연극을 만들어 가기 위한 모임이었기에 최종 성과물은 연극의 틀을 갖춘 공연인 것이 응당해 보였다. 그러나 이 모임의 종지부는 또다시 워크숍이었다. 단, ‘보여주는’ 워크숍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서 이것은 완벽한 공연의 형식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 오픈된 워크숍은 기존의 워크숍을 확장하고 연장했다.
관객에게 관람 예절을 요구할 수도,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경고’의 언어를 취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몸풀기 체조로 각자의 일상에 있던 몸들을 워크숍 공간 안으로 초대하는 시간을 가졌고, 우리가 함께 작성하고 실천하던 ‘우리들의 약속’을 다시금 읽으며 이 공간 안에서 함께 부대끼는 몸들을 서로 존중할 것을 다짐했다. 다만, 지금까지의 워크숍과 다른 것은, 워크숍 장소가 달라졌다는 것, 그리고 이 장소에 우리가 초대한 관객이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의 워크숍이 평소보다는 조금 더 정리된 형식을 취할 것이라는 점이다.
참고로, 여기서 사용하는 ‘우리’는 그간의 워크숍을 함께한 사람들이자, 이 오픈된 워크숍의 공연성 즉 보는 이들을 향해 ‘보여줌’을 감행하는 이들을 함께 지칭한다. 다만 ‘우리’라는 주어를 사용하면 이 말에 포함된 이들을 전부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우려에 잠시 주저했지만, 그간에는 기록자였던 내가 오픈 워크숍에서는 문자통역자로 참여함으로써 이들과 “일치감을 느끼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우리’ 사용에 대한 위와 같은 자각 및 주의에 대한 힌트는 수전 웬델, 『거부당한 몸』 참고)
모두가 참여해도 되는 프로그램
워크숍은 ‘우리는 서로 다르다’ ‘몸으로 만나요’ ‘장소 표현하기’ ‘장면 만들기: 달라서 생긴 일’까지 크게 네 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총사회를 맡은 아름의 진행하에 진희, 윤정, 예슬, 주영이 각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했고, 유리, 석준, 재영, 선자, 세미, 경일, 지원, 성환, 유다, 성재 등 10명의 워크숍 참여자, 그리고 현장에서 참여를 원하는 관객이 함께하는 시간으로 꾸려졌다.
먼저,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각기 다른 모양과 색색의 스티커로 자신을 표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진희는 간단한 취향과 생각을 묻는 질문을 던졌고, 참여자는 나만의 답변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스티커와 테이프를 바닥과 벽면에 붙여나갔다. 내 취향, 생각, 감정에 의하여 내가 위치해 있는 공간의 표면을 장식하는 방식이다. 각자의 취향이 다르다는 것, 그래서 각자를 둘러싼 공간의 표면이 달라진다는 것은 결국, 실제로 우리가 발 딛고 있거나 기대고 있는 세계는 각자에게 주어진 선택의 장 안에서 구성된 것임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 선택의 장이 반드시 절대적 자유가 실현되는 공간일 수 있다고 단언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어진 ‘몸 움직이기’에서는 윤정의 진행에 따라 참여자가 서로의 몸을 연결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참여자들은 한 명씩 순서에 맞춰 움직이며 서로의 신체에 어떻게 맞닿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자세도, 이어지는 신체 부위도 제각기 달랐고, 무엇보다 이 대열은 직선이 되지 않았다. 각각의 몸으로 이어진 이 굴곡진 실선은, 개인이란 나열될 수 없음을 떠오르게 한다. 앞사람의 몸과 잘 연속되고 있는지, 다음에 이어질 몸의 연결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내가 이루는 이 합이 오차 없는 나열 속에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각자의 몸으로 각각 움직였고, 개개인의 자세는 결국에는 선이 되었다. 굽이도 파열도 요철(凹凸)도 가능한 3차원의 선 말이다. ‘우리’란 각각의 ‘나’가 있어야 가능하니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프로그램 모두가 관객 참여가 가능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 만들기: 남들과 달라서 생긴 일’은 참여자가 일상생활 중 자신의 장애가 가시화되었을 때 당한 부조리한 일을 한 장면으로 재현하는 순서였다. 참여자들은 이 부당한 순간을 다시 호출하며 당시에는 하지 못했던 말들을 고안했다. 이 고안은 참여자‘만’의 것이 아니라 관객의 것이 되기도 했다. 몇몇 관객은 장면 안으로 뛰어 들어와 ‘하지 못한 말’을 더 과감하게 대신 발화해 주었다.
쉬이 맺지 않기: 대화가 될 독백들
4개 프로그램 사이사이에는 참여자의 ‘독백’ 순서가 삽입되었다. 첫 번째 독백인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는 경일, 유리, 지원의 말을 들었다. 경일은 사진 찍는 일을 “좋아했고” 좋아하는 음식으로는 김치와 불고기를 “택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유리는 자신 있는 글쓰기와 자신 없는 뜨개질을 동시에 좋아한다고 말했다. 어느새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뜰 수 있게 된 순간, 뜨개질에 관한 에세이를 써볼 의지가 생겼다고 한다. 꾸준함은 ‘할 수 있음/없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음’에 해당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지원은 자신의 손때묻은 작품을 전시하고, 선물할 수 있게 하는 취미인 “보석십자수”에 대해 말했다. 지원의 아름다운 보석십자수 작품들은 워크숍 공간에도 전시되었다.
두 번째 순서인 ‘나의 몸’에서 석준의 말이 이어졌다. 석준은 “언제나 행복한 몸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항상 우울”하기도 함을 말한다. “먹는 것도 잘 소화도 못하고” “힘이 들면 자동으로 눕게 되어” “사람들이 (이런 나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전한다. 그는 오해받기 쉬운 자신의 몸을 이해하기 위한 정보들, 그리고 “무엇이든 함께 하고 싶은” 자기 마음을 뒤섞어 말한다.
세 번째 순서인 ‘나의 공간’은 재영, 성환, 선자, 세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재영은 도서관을 좋아한다. 책도 많지만, 함께 가는 복지관 친구들, 도서관 밖 잔디와 의자, 그리고 나무가 그 장소를 “마음이 편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환은 자신의 집을 “안식처”라 표현한다. “쿨 오브 듀티 게임도 하고 넷플릭스도 보고” “좋아하는 요리인 파스타와 김치찌개도 만들 수 있고” “즐겨보는 강철부대3”을 볼 수 있고, 무엇보다 “혼자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선자의 공간은 극장과 카페이다. 그는 극장에서 “힘과 용기”를 얻고, 카페는 “극본을 쓰거나 개사 또는 작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는 카페에서 친구들과 개사한 〈버터플라이〉 가사를 들려준다. 세미는 졸탄극장을 좋아한다.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음도 나고” “졸탄 멤버들이랑 같이 신나는 노래에 맞춰 춤출 수 있는” 공간이다.
마지막 독백인 ‘나의 투쟁’은 유다, 성재의 말이 발화되었다. 탈시설 4년 차에 접어든 유다는 피플퍼스트 광진센터에서 동료지원가로 일하고 있다. 그는 올해 “서울시 장애인일자리 면접에 합격하여 일하고” 있다. 그의 투쟁의 언어는 지난 9월 18일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서울지역본부 로비에 있었던 점거 농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고용노동부는 내년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지원 사업’의 예산안을 전액 삭감하였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피플퍼스트 소속 활동가들은 이에 반대하는 점거 농성을 벌인 바 있다. 그는 체포되었던 그 날, “질문이 너무 어려웠”음을, “잊지 못할 치욕스러운 날”이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앞으로도 “우리의 목소리를 전하는 사람이 되겠다”라고 선언한다. 마지막 독백자인 성재는 아래와 같이 경찰과 국회의원을 호명한다.
“경찰들아, 당신들은 장애인들을 왜 막는 거냐. (중략) 국회의원들아, 탈시설 시키고 발달장애인 권리중심 일자리도 늘리고 장애인 고용 일자리 늘려주세요. 박경석 대표나 휠체어 타는 장애인들 연행하지 말아주세요. 장애인 수급비와 연금도 늘려주세요.”
그의 말은 평어로 시작하였지만, 어느새 경어로 바뀌어 있었다. 문법적 오류로 격하시킬 수 없는 말이었다. 말 마디마디에 깃든 복잡한 관계와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성재의 원성은 원성만으로 끝나지 않고 간청이 되었다. 간절한 요청이다.
문화비평가 한병철은 『아름다움의 구원』(문학과지성사, 2016)에서 바르트의 상처의 미학, 릴케의 봄과 상처의 상관성을 인용하며, 예술과 사유는 ‘상처의 부정성’에서 촉발된다고 말한다. “고통과 상처가 없다면 동일한 것, 친숙한 것, 익숙한 것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전율 대신 만족만을 느끼게 하는 “동일자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상처를 입히는 ‘봄(see)’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어반복 하는 공연, 그 속에서 안온함을 느끼며 만족에 머무는 관객. 이러한 예술은 응고되어 간다. 이 응고 속에 전율은 없다.
‘보는 일’은 ‘연루되는’ 일이어야 한다. 눈앞의 공연자를 ‘보이는’이 아닌 ‘보여주는’ 이로 만드는 ‘봄’들. 이 봄은 관객이 객(guest)으로만 남지 않고 지금 마주한 그 세계를 어떻게든 나의 세계와 연루시키는 노력에 의해 탄생한다. 관객은 제4의 벽 뒤에 숨겨진 존재로만 할당될 수 없다. 이 공연이 어떠했는지 쉬이 마침표 맺는 문장의 주인이 되기보다, 이 공연으로써 내게 주어진 물음표의 실마리들을 어떻게 이어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 기실 관람은 목격의 연장선에 있다. 관객은 눈앞에 벌어진 이 재현의 시공간이 가리키는 실재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다 다른’ 이들을 ‘본다’는 것은, 다름을 인정한다면서도 인지하지 못했던 곳곳에서 일어나는 차이 소거의 현장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의 독백을 독백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다. 이 균열의 문장들을 이어받아, 나의 또 다른 문장을 생성할 차례다.
장기영
읽고 쓴다. 공연·영화·소설·시 등을 보고, ‘봄’을 ‘읽음’으로 꿰어, 이내 ‘씀’으로까지 전개시킨다. 이 행위가 평론 혹은 연구라고는 불리지만, 실은 ‘보고 읽고 쓰는 사람’으로 불릴 때가 제일 마음 편하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에서 학생들에게 쓰고-읽고-말하고-듣기를 가르치고 있다.
kalce7@naver.com
사진 제공. 극단 북새통×플랜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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