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광장
몇 달 전, 처음으로 ‘홀로 여행을 떠나보자’라고 결심했었다. 원래 20대 때는 남이 눈치를 주든 말든 누가 여행을 간다고 하면 모든 걸 내팽개치더라도 나도 가고 싶다며 따라나서기 바빴던, 낄끼빠빠(낄때 끼고 빠질 땐 빠짐)도 제대로 못 하는 철부지 장애여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망부석처럼 혼자 가만히 집에 있는 게 가장 좋고 직장 출퇴근조차 힘들어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익숙함이라는 함정에 빠진 나는 매일 똑같은 장소에 출퇴근하고 어제 했던 일을 오늘도 이어가면서, 이미 여러 번 본 영상을 계속 시청하는 듯한 일상에 갇힌 것 같았다. 가끔 원고 청탁이 들어와서 글을 쓸 때면 문득 ‘더 이상 내가 쓸 수 있는 글감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고 글 쓰는 것도 흥미가 떨어져 갔다.
제주살이 도전!! 그러나 쉬운 게 없는 여행 준비
그날도 무료한 일과를 마치고 평소처럼 영상 콘텐츠를 찾아보는데, 휠체어 탄 장애여성 유튜버가 혼자 여행하며 기록한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 영상을 보며 내 안에서 무언가 일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안 해본 걸 도전하며 살고 싶다는 열망이 순간적으로 가슴에 훅! 꽂혔다. 마치 하늘에서 계시를 받은 것 같았다. 여행 가고 싶다는 마음이 온몸에 번졌다. 그 마음은 제주도 한달살이를 해보고 싶은 열망으로 변했다.
마음을 먹고 얼마 뒤, 막상 한달살이를 준비하려고 보니 나는 훌쩍 떠날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우선 활동지원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현재 나에게 파견된 활동지원사는 세 분이다. 평일은 오전과 오후 한 분 저녁 시간 한 분, 이렇게 두 분이 교대하고 있으며, 주말은 한 분이 전담한다. 만일 내가 제주도 한달살이를 가면 세 분 중 두 분은 한 달 동안 일을 쉬어야 한다. 이 상황에 대해 활동지원사 한 분은 급여 손실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또 다른 문제는 활동지원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시간이 부족해서 한 달 내내 야간 활동지원을 쓸 수 없다. 방법은 여행에 같이 갈 활동지원사와 협상해야 한다. 벌써 20년 넘게 활동지원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지만 활동지원사와의 조율은 늘 어렵고 긴장된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혹시나 그만둔다고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행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도 전에 활동지원사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피로감이 밀려왔다. 결국 제주도 한달살이에서 제주도 이주살이로 계획을 변경했다.
혼자 여행은 처음이라
비행기 예약을 한 번도 혼자 해본 적이 없었다. 항공사 앱을 설치하고 시간 예약까지는 성공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여행 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전동휠체어를 가지고 가려면 따로 전화 신청해야 하는 것이었다. 서둘러 항공사에 전화했다. 전동휠체어 무게와 크기를 말했더니 내가 예약한 시간대는 화물칸이 작아서 전동휠체어를 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순간 잠깐 어지러웠지만,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얼굴도 모르는 상담원과 긴 시간 동안 통화하며 듣기 평가를 하는 것처럼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했고, 간신히 비행기 예약 시간을 바꿨다. 이 소동이 항공사와의 마지막 고난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여행 당일, 또 한 번 전동휠체어 배터리 문제로 말씨름해야 했다. 내가 아무리 고체형 배터리라서 위험하지 않다고 설명해도 항공사 직원은 본인이 꼭 직접 봐야 한다는 거다. 화가 많이 났지만, 비행기 탑승 시간 때문에 직원과 계속 싸울 수 없어서 전동휠체어 업체와 전화 연결을 해주었다. 업체에서 배터리 안전성을 보증한다니까 그제야 통과할 수 있었다. 이때 만약 장애인 콜택시가 바로 올 수 있었다면 집으로 빠르게 귀가를 했을 것 같다.
여행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순간을 넘기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제주도로 떠날 수 있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해 제주도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해서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는 ‘삼달다방’이라는 곳이다. 삼달다방은 제주 지역 외곽에 있지만, 누구나 편하게 와서 쉴 수 있고 장애인 배리어프리가 기본으로 설계된 곳이어서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다. 활동지원사와 단둘이 가는 여행이라 어색하기도 해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삼달다방을 택한 이유도 있다. 그렇게 삼달다방에서 나의 제주살이가 시작되었다.
제주살이 첫날은 삼달다방 주변을 산책하며 제주의 조용하고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보냈다. 푸른 숲과 나무 냄새, 자동차가 없는 한적한 동네를 아는 언니와 같이 다니며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기분이었다. 저녁에는 다른 방에 머무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만에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시간을 통해 삼달다방에서 추구하는 ‘사람을 잇다’라는 슬로건의 의미를 느꼈다. 삼달다방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쉼을 위해 오고 간다. 내가 있는 기간에도 다채로운 사람들이 왔었다. 특히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활동가도 오셔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글쓰기에 대한 나의 고민을 말하자 값진 조언도 들을 수 있었다. 평소에 책과 강연을 통해 존경하던 분을 직접 만난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인데 듣고 싶었던 조언까지 들으니 너무 황홀했다.
사람을 잇는 글을 계속 쓰고 싶다
비현실처럼 느껴지는 꿈같은 나날을 보내는 중에 삼달다방 운영자인 무심 님이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한여름은 아니지만 9월 중순인 지금은 바닷물이 따뜻해서 바다 수영 슈트를 입고 수영하면 괜찮다며 혹시 해볼 생각 있냐고 물었다. 이때 내 마음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수영을 좋아하는 나와, 중증장애를 가진 몸으로 낄끼빠빠를 잘해야 한다는 엄격한 나와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오래전에 단체에서 사람들과 제주도에 온 적이 있었다. 한여름이었고 모두 바다에 들어가서 노는 분위기이었다. 그 당시 낄끼빠빠를 못했던 시절이라서 아무 생각 없이 나도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두세 명의 협동으로 바다에 들어가 신나게 놀았다. 문제는 바닷물에서 나오고 나서부터 시작되었다. 모래와 바닷물이 뒤엉킨 몸을 씻어내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자원활동 온 사람들은 나를 샤워시켜 주느라 진땀을 꽤 많이 뺐다. 나중에 우연히 원망하는 말도 들었다. 이 기억이 나서 선뜻 바다 수영을 하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활동지원사 눈치도 보였다. 안 그래도 부족한 활동지원 시간 때문에 신경 쓰이는데 바다 수영까지 하겠다고는 차마 입이 안 떨어졌다. 내가 망설이자 주변 사람들이 슈트 입는 것도 도와줄 테니 일단 가보자고 설득을 해 왔다. 나도 ‘바다 앞까지는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결국 바다 수영하는 곳까지 갔다. 사실 사람들의 설득에 못 이겨서 간 것처럼 했지만, 바다 수영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마음속에서 첨벙첨벙 물놀이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내 마음을 읽어주었고, 결국 슈트를 입고 바닷물에 들어갔다. 바닷물에 들어가자 물에 굶주려 있던 물고기처럼 금방 적응하고는 추워서 입술이 시퍼렇게 되도록 나올 생각을 안 했다. 그렇게 제주살이는 하루하루가 재미있는 책의 책장을 넘기듯 흘러갔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먹고 수다를 떨며 보내니 시간이 반으로 줄어든 것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제주 이주살이는 끝났다.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있다. 그리고 이전과 다르지 않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여행을 갔다 와서 달라진 점은 언젠간 또 떠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삼달다방이 다양한 사람들을 잇는 것처럼 앞으로 나의 글도 누군가와의 삶을, 고민을 잇는 글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김상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비마이너] 칼럼니스트로 “김상희의 삐딱한 시선”을 연재하는 등 각종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차별적인 사회를 향한 저항하는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장애여성 활동가이다.
ester9079s@gmail.com
사진 제공.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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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가 겨우 2주밖에 안되서 더욱 더 꿈 같았을 거 같아요. 만약 한달살이였다면 9월 제주바다를 잔뜩 느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잠시나마 머물었던 동안에는 스트레스 풀렸을 것 같아서 보는 저도 떠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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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와의 실갱이를 읽을 때 벌써 피곤했는데, 언제 그랬냐는듯 삼달 다방에서 수다를 떨고 바닷가에 따라갑니다. 어느 새, 수영도 못하는 제가 몸을 담그고 물질까지 합니다. 노곤해집니다. 읽는 저를 제주까지 데리고 가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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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용기 내어 제주 여행 다녀오신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네요~ 작가님의 사람을 잇는 따뜻한 글로 앞으로 더 많이 만나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