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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리뷰 2026 모두예술극장 기획제작 〈크립스〉 늦었지만, 지금 우리 앞에

  • 글 김소연 연극평론가
  • 등록일 2026-10-14
  • 조회수 33

현장리뷰

‘크립스(creeps)’의 사전적 의미는 소름 끼치는 사람들, 불쾌하고 이상한 인간들이다. 기어가다, 엉금엉금 움직이다 등 동사의 의미도 있다. 영어 원제를 소리 나는 대로 옮겨놓아서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비하와 경멸을 담고 있는 말이다. 무대는 장애인 보호작업장 화장실이고, 이곳을 들고 나는 이들은 (희곡에서는) 모두 뇌병변장애인이다. 이들의 대화에는 욕설이 가득하고 서로를 조롱한다. 〈크립스〉는 우리가 직접 만났다면 서둘러 외면할 ‘나쁜’ 장애인을 우리 앞에 세운다.

‘나쁜’ 장애인

찌든 내가 훅 끼쳐오는 것 같은 낡은 화장실. 휠체어를 탄 한 사람이 등장해서 소변기마다 물을 흘러내리게 하고 칸막이 문을 두드린다. 누군가 안에 있다. 또 한 사람이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등장해서 칸막이 안에 있는 사람을 부른다.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알고 온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느린 걸음으로 등장한다. 그도 역시 이곳에 볼일을 보러 온 것이 아니다. 너희들의 ‘딸딸이’를 보러 왔다고 한다. 피트, 톰, 샘이 모였다. 물을 내리던 마이클은 말이 없고 화장실을 나간다. 작업시간에 변기에 앉아 만화책이나 본다고 피트를 힐난하지만, 톰과 샘 역시 작업시간에 빠져나온 것은 마찬가지다. 이들은 담배를 피우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피트는 자신의 임금이 너무 싸서 파업 중이라고 하고, 샘과 톰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쓸모없는 일이라고 푸념한다. 이들의 푸념은 ‘뇌성마비 클럽’의 우스꽝스러운 파티에 대한 낄낄거림으로 이어지고 자선단체들의 캠페인에 대한 조롱으로 흘러간다. 클럽과 자선단체만이 아니다. 샘은 손님을 초대한 저녁 식사 식탁에 앉지 못한 채 부엌에서 혼자 식사를 하다가 결국 모두가 둘러앉아 있는 식탁 위에 음식을 게워냈던 일을 무용담처럼 들려주고 피트와 톰은 함께 낄낄거린다. 이들의 두서없는 대화는 마치 이곳을 떠나지 않기 위한 구실을 이어가는 것 같다. 작업시간을 지키지 않고, 거친 말을 쓰는 ‘나쁜’ 장애인들이다.

물론 이들의 대화가 방해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뒤늦게 등장하는 짐은 피트, 톰, 샘과 달리 사무실에서 일한다. ‘공주님’이라는 조롱에 짐은 발끈하는데 남자 화장실인 이곳에 차마 들어오지 못하는 여성 관리자 손더스가 화장실 문 앞에서 짐을 찾으면서 짐이 왜 이곳에 왔는지 짐작하게 된다. 손더스는 몇 번이고 다시 돌아와서 어서 밖으로 나오라고 문을 두드린다. 밖에서는 손더스가 재촉하고 안에서는 넷의 비아냥과 조롱과 갈등이 점점 날카로워진다. 이들이 갈등하는 것은 보호작업장 안에서 각자 견뎌내는 것이 다르고 보호작업장 밖의 세상에 대한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목수가 되고 싶은 샘은 목공이 아니라 벽돌을 문지르는 일을 해야 한다. 손상된 근육과 손의 기능을 치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화가가 되고 싶은 톰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이 벽화를 그리라고 한다. 쓸모없는 상자 접기에는 임금을 지불하면서 말이다. 작가가 되고 싶은 짐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가 쓰는 글은 도움을 부탁하는 편지들이다. 보호작업장의 일이란 이처럼 사회적 쓸모도 모호하고 그 대가는 삶을 위한 경제적 토대도 되지 못한다. 자선단체의 후원, 그러니까 선의로 운영되는 이곳은 결국 스스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기에는 미성숙하고 무능력한 장애인이라는 믿음으로 이들을 ‘보호’하는 곳이다. 톰은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하지만, 짐에게는 그 선의마저도 없는 보호작업장 밖은 더욱 두렵다.

이들의 조롱과 비아냥은 바로 그 선의를 향한다. 대화 중간중간 이들이 모여 있는 낡은 화장실이 지워지고 무대에서는 화려한 쇼가 펼쳐진다. 다 큰 어른들이 형형색색의 리본으로 치장하고 핫도그를 들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쇼가 과장될수록 사회의 선의는 과장되고, 과장된 선의는 균열을 일으키면서 선의가 딛고 있는 믿음을 드러낸다. 그러니 이들이 보호작업장의 작업대를 빠져나와 화장실에 모여 위악적 웃음을 낄낄대는 것은 세상의 선의를 조롱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선의가 딛고 있는 단단한 믿음을 깨뜨리는 일인 것이다. 웃음이야말로, 자조와 위악의 웃음이 품고 있는 분노야말로 미성숙과 무능력의 반대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인종차별, 성차별의 언어까지 거침없이 쏟아내는 자조와 조롱은 위태롭기까지 하다.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는 절박함이겠지만, 차별과 배제를 드러내는 언어가 또 다른 차별과 배제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녹슨 공장 배경의 무대. 전동 휠체어에 앉거나 선 배우들이 왼쪽 끝의 신강수 배우를 집중하여 바라보고 있다. 왼쪽부터 신강수, 홍성훈, 유두선, 백우람, 호종민 배우가 각기 다른 포즈로 서거나 전동휠체어에 앉아 있다.

    〈크립스〉

웃음과 ‘크립스’의 역전

이번 공연에서는 연극의 웃음이 품고 있는 파괴의 에너지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것 같다. 성차별, 인종차별의 언어를 걷어낸다면 이 연극의 웃음이 품고 있는 파괴의 에너지가 희석될 것이다. 공연은 희곡의 거친 언어를 가능한 한 남겨두었다. 그러나 오늘의 관객에게 이 언어들은 인물의 절박함이기 전에 배제의 폭력으로 먼저 다가온다. 시대적, 문화적 거리다. 이 때문에 거친 파괴의 언어가 뿜어내는 웃음이 ‘크립스’, 불편하고 불쾌한 이들은 누구인가를 뒤집어버리는 동요를 만들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거리’를 감수하면서도 희곡의 거친 언어를 남겨둔 것은 의미 있는 선택이다. 그 거리를 그대로 남겨둠으로써 관객은 폭력의 언어에 감응하지 않으면서도, 웃음 뒤 인물들의 절박함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리 때문만은 아니다. 거리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의 인물을 객석 가까이 당겨놓는 것은 바로 배우들이다. 〈크립스〉의 장애인 역할은 1971년 초연, 그리고 이후 여러 공연에서 대체로 비장애 배우가 맡아왔고, 2016년 밴쿠버 공연에서야 장애·비장애 통합 캐스팅이 이루어졌다. 반면 이번 공연에서 장애인 역할은 모두 장애인 배우를 캐스팅했다. 희곡에서 짐은 뇌병변장애인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저신장 장애가 있는 신강수 배우가 맡았다. 배우들은 장애 유형을 강조하는 강직, 떨림 등을 연기하지 않았다. 자기 몸 그대로 무대에 섰다.

샘 역의 유두선 배우는 오랜 시간 앉은 자세가 주는 압박 때문에 때때로 휠체어를 눕히고 세우는 등 자세를 다르게 하면서 연기를 이어갔는데, 자세를 고치면서 달라지는 몸의 각도, 거기에서 비롯되는 목소리의 작은 변화 등이 빠르게 내뱉는 듯한 발성의 특징과 함께 샘의 위악적인 냉소를 두텁게 쌓아간다. 홍성훈 배우는 아무 말 없이 소변기의 물을 흐르게 하고 화장실을 떠나는 마이클과 광대, 프릭쇼의 무리로 오갔다. 그는 휠체어를 이동하는 속도와 방향을 다양하게 함으로써 제한된 몸짓만으로도 인물의 존재감을 확연히 드러낸다. 풍자적 쇼에서는 대사가 기계음으로 대체되었지만, 풍부한 표정으로 장애인을 대상화하는 상황에 대한 풍자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피트 역의 호종민 배우는 냉소적인 샘, 뜨거운 톰과 달리 온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느리지만 또박또박한 발성은 사건과 시선을 분명히 하면서 대화의 흐름을 조절해낸다. 톰 역의 백우람 배우는 다소 아쉬웠는데, 샘의 냉소를 화가에 대한 열정으로만 받아치면서 웃음에 대한 반응이 단조로웠다. 짐 역의 신강수 배우는 다른 세 배우와 장애 유형이 다르다. 물론 다른 세 배우의 장애 유형이 같다고 같은 몸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배우들의 경우 움직임과 말의 다양한 속도와 흐름이 앙상블을 만들던 것과 달리 신강수 배우의 움직임과 말은 겉도는 순간들이 있었다. 서로 다른 장애 유형의 배우들이 함께 무대에 설 때 다른 몸들이 어떻게 앙상블을 만들어갈지 배우와 연출 모두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피에로 가면을 쓴 세 배우가 나란히 무대 위에 있다. 양옆의 배우는 팔을 벌려 호응을 유도하고, 전동 휠체어에 앉은 가운데 배우는 풍선을 든 채 밝게 웃고 있다. 벽면에 ‘[띵똥도로도롱- 쿵짝쿵짝- 꿈과 환상의 서커스 음악]’이라는 자막이 투사되고 있다.
  • 네 명의 배우가 무대 오른쪽 앞에 긴장된 표정으로 한 곳을 바라보며 앉거나 서 있다. 유두선 배우가 왼쪽 뒤편에서 전동 휠체어에 앉아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뒤쪽 벽면에는 대사가 자막으로 투사되고 있다. (톰) “야, 마이클, 봐봐 / 바퀴벌레다, 엄청 크다”, (피트) “야, 샘! 여기 겁나 큰 거 있다”

〈크립스〉

델마의 소리 없는 비명

이번 공연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선택이 있었다. 바로 델마의 목소리다. 희곡은 델마가 뇌병변장애인이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만큼 델마는 직접 무대 위에 등장하지 않지만, 화장실에 모여 있는 피트, 톰, 샘, 짐 그리고 마이클과 함께 중요한 인물이다. 델마의 목소리는 연극의 시작에서부터 이들의 대화 틈틈이 마치 이들의 대화를 중단시키고 헤집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무대 위의 넷은 때로는 델마의 목소리에 반응하지만, 때로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지우려는 듯 무시한다. 그럼에도 연극 내내, 마치 무대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델마의 목소리는 이들의 주변을 맴돈다.

희곡에서 델마는 목소리로만 등장하고 연극의 후반부에 가서야 피트가 전하는 사건에서 전모가 드러난다. 그 사건은 샘의 성폭행일 수도 있고, 두 사람의 실패한 정사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저 그들의 대화로만 사건을 짐작하게 된다. 사건 이후 델마는 큰 정신적 타격을 입고 비명처럼 외치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 델마는 ‘소리’가 아닌 무대를 가득 채우는 강렬한 타이포그래피로 등장한다. 그러나 디자인된 문자는 델마를 재현된 이미지로 만들면서 지금 여기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의 존재감을 만들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소리 없는 비명으로 등장하는 델마는 목소리조차 빼앗긴 고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도리어 델마의 피해자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공연의 마지막에서야 델마가 무대를 한바퀴 뛰는 것으로 등장하지만, 희곡의 반복되는 ‘소리’와는 다르다.) 희곡에서 델마의 목소리를 강조하는 것은 델마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델마가 이들과 함께 여기에 있다는 것은 세상을 거침없이 조롱하고 분노하는 넷의 목소리에 또 하나의 겹을 만든다. 이 겹이 이 연극이 한껏 당겨놓은 남성 장애인들과는 또 다른 세상의 고통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상처 입은 존재를, 그것도 직접 등장하는 것이 아닌 소리로 등장하는 존재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는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러나 목소리가 문자가 되면서 델마의 의미가 협소해지거나 지워진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크립스〉는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인지도 모른다. 불편하고 불쾌한 사람들이 ‘무대 위의 저들’이 아니라 ‘여기 우리’라는 동요를 일으키기에는 무대와 객석 사이에 거리가 놓여 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낡은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이 ‘나쁜’ 장애인들의 몸부림 같은 조롱과 비아냥이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는 ‘다름’을 비정상, 미성숙, 무능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선의가 바로 그러한 이해로 지탱되는 것은 아닐까.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우리의 오늘을 환기하는 것은 무대 위에 선 배우들이다. 그들의 몸이, 이 이야기가 지금 여기에서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왼쪽에서 호종민 배우가 책을 들어 유두선 배우에게 보여주고 있고, 가운데 전동 휠체어에 앉은 유두선 배우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책을 보고 있다. 뒤쪽 오른쪽의 홍성훈, 신강수 배우는 손가락을 입에 물거나 웃으며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크립스〉

크립스

크립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2026.9.16.~9.20.|모두예술극장

뇌병변장애인 극작가 데이비드 프리먼은 보호작업시설에서 일하는 동안 1965년 캐나다 사회의 제도화된 불평등과 낙인, 장애인에 대한 시혜적 연민과 낙인의 구조를 몸소 지켜보고 겪으면서 〈크립스〉를 집필했다. 일할 수 없는, 다시 말해 능률이나 역량과 결부되지 않는 몸과 마음들을 손쉽게 ‘장애화’하는 사회로부터 이미 쫓겨난 뇌병변장애인 인물들을 통해 노동과 삶에 대한 자긍심과 분투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 데이비드 프리먼, 연출 강보름, 출연 백우람·신강수·양대은·유두선·정나무·호종민·홍성훈
∙ 공연정보 : 이음온라인 [문화소식]

김소연

김소연

연극평론가. [문화정책리뷰] 편집장. 좋은 공연을 함께 보기 위해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든다.
∙ 인스타그램 @sweetdream514

사진 제공.모두예술극장

2026년 10월 (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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