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아찔한 충격과 과제. 제대후 고향인 동호천지역 홍성군의
소도시에서 생활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마침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은행과
우체국 그리고 보험회사 등 금융 기관에 근무하던 친구와 선후회들이
많았다. 따라서 점심 시간과 퇴근 시간에 맞추어 청약서를 들고 애고
없이 사무실에 방문하여 최소 24개월만
계약 유지해 달라면서 매달림은 물론 전형적인 영업 마케팅의 방법인 선물은
물론 술과 음식 대접으로 밀어되는데 관공서에 근무하던 입장에서 냉정하게
거절도 못했다. 결국 5계사의 여덟 종의 상품의
본세대원이 4인으로 구성하여 청약한 총수량이
얼마나 되겠는가? 상상은이 글을 읽는 사람의 자유에
맡히겠다. 그러나 문제는 계약 이후 보험 증권이 우송될 때마다 전업주부인
아내가 먼저 받다 보니 그때마다 아내의 입에서 반복되는 말 말
또 보험 계약했구나. 월급쟁이에의 한정된 수입의 생활을
어떻게 하라고 자꾸 보험을 계약하는 거야?
라고 찬소리를 듣고 나였다. 나는 그때마다 우매 기죽어 깨갱깽
신세였다. 이렇게 생활하던 중 지난 2천년 내가
불리의 교통 사고 피해를 모아 척수 손상의 중중 장애인이 되어 직장에서
면직되었다. 가족의 도움도 없는 실태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며 계약 유지하던 보험이
여섯 종 있었는데 상품별 보험금을 청구받아 비록 다세대의 빌라이지만
내집 마련 자금에 보탬이 되었으며 생계 유지는 물론 자녀 양육 및
교육과 재활 치료비 등에 큰 도움을 받아 생활하고
당시 우리나라에 38개사의 각종 보험회사가 운영되고 있으나 계약자가
보험 사고가 발생했다고 약관의 내용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많지 않는 현실이 아쉽다. 특히 거액의 보험금은 대개 지급 거절에
따라서 법정 분쟁이 필현적이다. 따라서 보험 계약자는 설계사와의
관계보다는 자신에게 필요한 담보를 선택함과 자신이 계약한 보험의 증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필요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설 연휴의 시작으로 행복감에 도치하여 있을 때가
2002년 1월 30일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열평 정도의 좁은
가혹을 임대하여 네식구가 생활하고 있었는데 피보험자인 아들이 막 보행을
시작하며 말성을 부리기 시작할 때였다. 나는 불의 사고로 격추
손상의 불완전 마비 상태로서 거동이 불편하여 내 관리도 못 하고 있는
실태에서 함께 놀아주지 못함은 물론 아내의 부업 일거리가 방한 구석에
널려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아이 모욕을 시키고자 물을 끓여 놓은
곳으로 아이가 뒤뚱뒤뚱 걷다 그곳에 넘어지면서 양손을 목욕물 속에 짚어
양손과 팔에 이도 화상을 입게 되는 불행스러운 일이 있었다. 깜짝 놀란
우리 부부가 물속에 엎드려 있는 아이를 꺼내었다. 양팔이 붉은색으로
변한 환부에 수돗물과 환부의 열기를 시키고 소방관의 도움으로 인근
종합병원을 찾았더니 대학 병원에서 수술이 필요한 상태라며 응급 처치를
받고 화상의 고통에서 우울부짖는 어린 아들을 대학 병원으로 전원하여 약
1개월간에 이번 치료를 받으면서 다인시를 이용하니 지속해서 이어지는 통증과
환부의 소독과 주사 접종으로 어린 아들이 얼마나 울었을까?
급기야 다른 환우와 보호자들이 너무 운다는 등 따가운 눈총과 면박을
견디다 못해 독실로 이전하고 어린아이에 장장 6시간에 걸친 변현
절제수를 받고 300만 원 가량의 치료비를 신용 카드로 결제하고
태원하여 보원금을 청구하니 화상 치료비 수술비원금
등의 보험금을 받아 다 갚았던 어려웠던 시간을 잊을 수 없다. 비록
현재 아들 양팔에 흉한 흉터가 남아 있지만 무사히 성장하여 현재 고등학교
3학년으로 후유증 없이 학업에 열중하며 좋아하는 축구부 활동도
열심히 하는 등 마음도 밝고 신체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반없이
귀엽고 고마우며 미안하기만 한 지문둥이가 어느덧 대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이명 준비를 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아들이 아빠 나 공군
장교가 되고 싶은데 비행하면 수술 보위가 넓어 터진다는데 공구는 못
가지 않나요? 하는 말을 종종들을 때마다 부모의 부주의에 대한 제책감이
앞서면 물론 앞으로 흉터 제거 수술을 해 줘야 하는 숙제에 대한 이중의
고통을 느낀다. 그래도 그때 화상 부위가 얼굴 부위가 아님에 감사할
따름 생각만 하여도 아찔하지만 다행이라고 위안으로 삼았다. 또한
만약 보험과 인연이 없었다면 경제적 소득이 없었던 우리가 그 막중한
치료비를 어떻게 감당했겠는가? 따라서 우리 부부는 모두 감사하며
다행이라 생각하며 현재에 만족하며 생활하고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보험 회사에서 판매한 상품의 신의와 사랑의 실전을
기대하면서 그를 맺는다. [음악]
돈이 되었던 취미
돈이 되었던 취임이 아침이 되면 오늘은 무슨 일을 하고
하루를 보낼까 하는 생각에 적고하였다. 그렇다. 나는 불리의
사고로 인한 후유 장애에 따라 공고 사직 실업자이다.
사고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맛이 어느덧 중학교에 입학하였을 때였다.
EBS 학습 목적으로 인터넷을 가설하고 컴퓨터를 구입하였다.
그날부터 딸은 방송 시간에 맞추어 학습하였다. 그때 낮도한 몸이 건조한
생활의 소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딸이 학습을 마치면 내가 구인 정보를
탐색하였다. 그러나 중장애인 나에게 맞는 일을
찾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당시 유행하던 회사의 홍보 사업인 경품
행사 응모 사이트 아조화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 올린 정보가 매우
많았다. 정보의 양의 업체수도 비례하였다.
많은 정보 중 수기 공모의 중점 공략 응모하였다.
약 3개월이 지나자 하루에 세 건의 우편물이 배달되는 날이 많았다. 당첨
경품인 유가 증권이었다. 응모 기간에 따라 당첨 경품이 비례로
증가하였다. 우편물을 받아 봉투를 뜯을 때마다 마치 젊은 시절 연애
편지를 받는 듯 마음의 설렘은 물론 즐거웠다.
이렇게 수령한 경품을 대파 용돈을 주며 밝게 웃는 어린 남매의 미소화
바꿨다. 그중 귀억에 남는 일이 몇 가지 있었다. 한 번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 야우 K주관의 체험수기에 응모하여 대상에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며칠 후 지정 계좌로 100만 원이 입금되었다.
첫 고려치고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마치 늦잠에 취하여 꿈을
꾸는 듯하였다. 이것이 활력을 얻는 계획이었으며 매진하게 된
원인이었다.뿐만 아니라 서비스가 세계 최고 항공사로
유명한 에어 F의 주관 이벤트에 응무하였다. 그 결과 유럽 다섯
개국을 여행할 수 있는 항공권에 당첨되었다. 그러나 신체적 여건으로
해외 여행은 나에게 큰 모험이자 무리였다. 또한 당시 경품의 소비자
가격에 대하여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당시 우리 가정 1년
생활비를 우떠는 금액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아내가 토끼 눈으로
거실에 우두컨이 바라보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 소비자 가격의 22%를
소득세로 납부해야 한다.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며칠 고민 끝에
경품 수령을 보기하였다. 기타 소득은 매년 5월 홈택스를
통하여 종합소득 신고를 하면 황급받는 세법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초보
시절에 아픈 경험이다. 2008년을 기점으로 큰 경품을
내놓는 회사를 찾을 수 없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아마
사업체의 지출에 비하여 홍보 효과가 낮음 때문 아닐까 조심스에 추측해
본다. 8년간 국세청에 세무 신고하면서 유지하였던 치미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동안 육과 증권으로 배부르던 책상설랍이
15년째에 비어 먼지가 가득 쌓여 있다.
인연의 그림자
인연의 그림자. 나에게 대학생활부터 7년간 교재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취직과 동시에 어머니의 결혼 자금으로 아들
이름으로 우체국 적금 넣어 준다는 약속을 믿고 월급 전액을 맡겼다.
용돈이 없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그녀가 식사와 커피를 사 주었다.
약 3년이 지난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그녀와 약속이 있어 늦은
시간까지 함께하고 막 귀가하였다. 그런데 불도 켜지 않는 마에 할머니
혼자 앉아 쪼그려 앉은 채 울고 계셨다.
알고 보니 어머니께서 전신마비 증세로 병원으로 후송되었단다.
즉시 의료원으로 달려갔다. 아침 검사가 끝났다. 그러나 응급 의사가
지주마카 출혈이라며 대학 병원으로 전원을 강력하게 권하였다. 그래서
택시로 천한 순천양대를 경유하여 연세대 병원에서 계두수를 받으셨다.
그때 아버지께서 병원비 도움을 청하시기에 어머니가 관리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알아보았다. 약속과 달리 S보험 회사의 당신의로
적금을 유지하심을 발견하였다. 더욱이 보험회사 적금의 피보험자는
질병 등의 담보가 없다. 그래서 재활 치료를 못 받으셔서 고동도 못하시는
상태로 대원하셨다. 당시 형은 멀리 부산에서 생활하고
동생들은 군복무 중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출근하고 68세의
할머니가 며느리 시중을 들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힘드실 때 나에게 연애도
못했냐? 호통을 치셨지만 그렇다고 거동을 못 하시는 어머니의 봉양
문제로 혼전 동거를 제안할 수 없었다. 기다리던 어느 날 전화하니
그녀가 엉엉 울면서 성폭력 피해로 몸이 더럽혀졌다.
앞으로 만나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만남까지
거부하며 홀연이 부천 언니로 떠났다.
나의 가정 여건에 따라 오지압 좋게 그 7년간 긴 세월 그림자 되어 나를
따르던 여인의 상처와 고통을 외면하고 말았다.
다른 인연이 되어 부모님을 봉양하던 중 형의 귀향으로 2년 만에
분가하였다. 새로운 삶에 젖어 잊고 생활하던 중 대학 동기를 방문하여 그녀를 만났다며
현재 개인 다섯 대를 운영하는 운수 사업자와 결혼하여 잘 생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행복한 삶을 기원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생활을 겪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문득운 생각이 떠오른다.
아직까지 아쉬운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나 보다. 그러던 중 아내까지
내경색 후유증으로 인군 의료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던 어느 봄날이었다.
아내가 병시돼서 10분 정도 먼저 나가자 하는 말에 지하 재활 치료실
복도 의자의 아내와 나란히 앉아 대화하며 대기하던 중보
앞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림에 반사적으로 바라보았다.
이상 기온의 탓신가? 아직 4월이거늘을 라일라 꽃같이 소복한 미소뛴 중년
여성이 시선을 고정하고 내 이름을 들리지 않게 반복적으로
시읍조이듯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28년이란
넓은 시간의 강을 건너 만났다. 무척 반가웠다. 그러나 중증의 장애인으로
변한 나의 모습을 직접 대면하고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치료 중인 아내가 옆에 있는데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없었다.
짧은 시간 많은 생각으로 머리가 혼잡했다. 무엇보다 신체적으로 많이
변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 도망치고 싶은 나의 앞에서 자신의 생활을
열심히 브리핑을 하면서 내 마음은 애정과 같은데 너는 왜 이래라는
물음을 던지고 떠났지. 그 후 2, 3주 지났을까?
아르바이트 하던 딸이 계단 이동중 실족화였다. 응급 수술 목적으로 순천양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한 첫날 칼국수 먹고 싶다는 딸을 데리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간호사의 호출 전화를 받은 딸이 링걸 거치대의
도로를 구르는 둥근 바퀴 소리를 남기며 멀어짐을 들으며 인도에서 상이
포켓에 있는 담배를 꺼낼 때였다. 가까이에서 언니 왜 자리를
바꾸자고요? 하는 젊은 아가씨의 볼맨 음성이 들리기에 머리를 들어
바라보았다. 약 5m 앞 택시 승차장에서
뒷자리에 먼저 탔던 여성이 밖으로 나오면서 아가씨가 안쪽으로 타세요라는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자. 중국이 우와의 첫사랑 실패 고통을 못
이겨 유체 이탈하여 첫사랑을 찾는 창녀가 내게 나타난 것인가 하는
착각과 동시에 놀라운 마음으로 아무 말 못 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택시 문을 닫자마자 나의 앞을 스치듯이 나는 택시를 아쉬운 마음에
강력한 시선으로 유리가 뚫어지라 보았으나 짙은 일광력을 뚫지 못하자
처염한 마음으로 피우는 히뿌이한 담배 연기에 묻혀 눈앞이 아론거렸다.
긴 기간, 즐거운 추억의 수에 고통이 비례된다 하였던가? 그동안 추억몬이
양자 물리학의 기본 원리로 끌어당김이 나의 오래된 습관일지라도
이렇게 부자연스럽고 경직된 만남을 기대하지 않았다. 또한
그동안 반복적 상처에도 현재까지 기억하고 외면하지 않고 다가오면
고맙다. 이제는 더는 아파하지 말고 건강하고 행복이 가득한 삶을
기원한다. [음악]
이상한 구정
이상한 구정. 명절이 다가오면 누구나 가슴살렘이
일기 마련이다. 요즘에는 산업의 급진적 변화로 명절의 분위기가
사라졌다. 70년대만 하여도 1차 산업인 농업이 국가의 역점
사업이었다. 따라서 가족들이 인근의 마을을 이루어 생활하는 집촌 지역
형성이 특징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어서 평상시에는
인근 사촌 형제와 자매 옷을 물려받아 입고 생활하는 실태였다. 이때
명절에는 어린이들에게 세 가지 공통 기쁨이 있었다. 명절 앞두고 부모가
새 옷을 사 주셨다. 이것을 비밀라 칭하였다. 그래서 명절이 다가오면 새
옷을 입을 기대감에 그 설렘의 첫 번째다. 또한 그때는 고작해야
심리 사탕과 라면땅 그리고 쫀득기가 대표적 군거질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용돈을 받는 일부층의 특권이었다. 하여 매년 겨울에서
봄까지는 고구마와 옥수수가 서민의 대표적 점심이었다. 그리고 뒷산에
자생하는 식뿌리를 캐어 마치 껌처럼 질 씹다 보면 입술 전체를 검게
물드였다. 이것이 대표적 간식이었다. 그러니 명절에 조상님께 올릴 차례를
위하여 기름진 음식 내음이 온 마을을 물들인다. 그때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두 번째 기쁨이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본가의 경제력이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삼촌이 멀리 부산으로 분과하셨다. 따라서 명절
때마다 방문하셨다. 그때마다 용돈과 함께 하름 들고 오신 선물을 가족들에
나누어 주셨다. 이렇게 명절 때에만 받는 용돈과 선물 받는 것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것이 세 번째 기쁨이었다.
매년 명절이 되면 이러한 기쁨의 찬 마음으로 몇 날 밤 못 이루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러나 2020년 신정부터 코로나1 바이러스 확산에
따라 방문은 못하고 저마다 가정에서 명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래도 명절의
기분은 남았다. 처가에서 장목해서 떡을 보내셨고 딸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비대면 수업 중인 동생과 함께 시장을 봤다. 그 후 마비로 불편한 엄마를
도우며 요리하느라 주방이 부산하다. 이렇게 음식이 완성되었다.
아내가 철질로 완성한 전을 소파에 앉아 휴대 전화를 이용하여 페이스북을
열고 습자에 매진하는 나에게 한 접시 가져왔다.
가져다 준 전을 씹을였다. 갑자기 입천장의 이질감에 이어 우측 어금니가
허당으로 느껴졌다. 이후 음식을 씹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명절
연유이기의 치과가 휴진이었다. 그렇다고 이러한 증세로 응급실 진료를
받기에는 그했다. 그래서 연휴가 끝나면 진료받기로 결심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얼굴에 부종 증세가 심해진다며 아들과 딸이 서로
응급실에가 보자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나는 대수롭지 않는 것 가지고 부산
떨지 말라며 거절하였다. 누군가 했던 통증은 어두운 밤에 심하다는 말이
맞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통증도 깊어졌다. 그래서 상비용 진통제를
복용하여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침대에서 뒹구누라 잠시도 잠을 못
잤다. 밤새 괴롭히던 통증이 아침이 되자 완화되었다.
밤새 못잡기에 낮잠으로 대체하며 나을간의 연유를 보냈다. 누구에게나
즐겁고 행복해 할 명절에 나는 깊은 고통의 늪에서 호우적거리며 보냈다.
[음악] 고마운 선물.
고마운 선물
무더운 여름 기온이 소술 바람에 밀려 바닥에 떨어져 뒹굴던 낙엽이
총걸음으로 뒤따르는 걸음이 썩걱걱 들리는
깊어지는 가을에. 아침이었다. 주방 식탁에 앉아 아내와 함께 커피를
마실 때였다. 탁자 위에 놓인 휴대의 전화가 멜로디 울리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덮개를 열자 액정에 박땡이라
이름이 띄워졌다. 그는 중학교 동창으로 홍성읍 사무서에 근무하는
친구다. 가 보행장애로 지팡이의 의존에 길을 걸을 때 대게 운전의
집중 또는 무관심으로 지나기 일수이다. 이러한 현상은 학창 시절
절실한 친분 관계가 없는 한 같을 것이다. 그러나이 친구는 도로에서
나를 발견할 때마다 차창을 내리고 나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드는
반가운 친구다. 그러나 내가 거동 불편에 따라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모임 혹은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친구의 이름을 잊었다. 만날 때마다 미안하였다 하여 먼지가 가득
덮혀 누럽게 빗바른 중학 시절 졸업 앨범을 뒤적여 그 친구의 이름을
찾았다. 그 후 더욱 친근하게 지내고 있다. 어느 날은 친구가 일하던 중
쏟아진 밤을 모았는데 집에 있지. 지금 가는 중이니 잠시 기다려 하며
전화를 끊었다. 즉시 출입문을 열고 나갔다. 친구가 벌써 도착하여 손에
하얀 비닐봉지를 들고서 있었다. 그 봉투를 나에게 걷는 친구는 나 바빠서
맛있게 먹어.라는 라는 말을 남긴 채 뒤돌아갔다.
비닐를 열어보자 선어대에 보이는 쌍둥이 알밤들이 온기종기에 모여
있었다. 또 다른 비닐에는 한 마리의 생닭이 독탕에서 모욕하려는 듯
홀딱벗음 알몸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저녁 때가 다가오자 친구가
주고 간 닭을 다루느라 아내의 손길이 분주하다. 담백하고 얼큰 닭복 금탕
요리가 완성되었다. 온 가족과 맛있는 식사를 하며 반주를
한잔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새로운 발
새로운 발이는 우리의 삶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생활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각종 나무로 제작 활용하였다.
부모님께서 연로하시어 기력을 이르셔 오행을 못 하시는 경우 가족이나
자녀가 부모님께 만들어 보행에 도움을 주었다. 현재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나무보다 철제로 제작 활용함이 대중을 이루고 있다. 질병
및 사고의 후유증으로 많이 이용하였으나 등산의 필수품이 되었다.
또한 사용 연령층까지 낮아진 것이 특징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내 나이
33시였다. 물고기의 살란으로 분주한 봄날이었다.
야간 낚시의 귀가 중 부위의 사고로 목등뼈 부위신경 손상을 입었다. 마비
증세가 좌측 부분에 강하였다. 지지력이 약하여 두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고 나였다. 어제까지 내 의지대로
뛰어다녔는데 하루 아침에 나의 몸이 나의 의지를 배반한 것이다. 한마디로
독립적 보행을 못 하게 되었다. 그 후 6개월 가량 휠처로 이동하며 재활
치료를 받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병 간호하시던 아버지께서 메이딩인
코리아 로고가 붙어 있는 검은색 철제 지팡이를 사오셨다. 그러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빨리 걸으렴 하시며 나의 손에 쥐어 주셨다. 7개월에 긴 시간
이번에 고통을 뒤로 던지고 그 지팡이를 짚고 대원하였다. 이렇게
나에게 또 하나의 발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다른 병원의
병실에서나 재활 치료를 위한 이동에 쉽게 이용하였다. 아니 매일 나의
오른손에 잡혀 내가 움직일 때마다 한 족장 앞서 나를 안내하는 새로운 발이
되었다. 23년간 지속적인 재활 치료와 운동에도 나의
신체 장애 상태에 호전이 없었다. 더욱이 허리 등뼈 추관 탈출증의
요통으로 허리를 구부린 상태로 보행한다. 이때 체중이 앞으로 쏠리게
되는데 이때 지팡이 밑부분의 미끄럼 방지용 고무 패킹의 노면 마찰 증가로
쉽게 마모된다. 지팡이 사용 중 두 번의 위험이
있었다. 고무 패킹이 마모되었어도 아스팔트 도로는 미끄럽지 않다. 다만
걸을 때마다 도로와 철의 마찰로 따각따각 소리가 발생하여 행인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러나 고무 패킹이 마모된 지팡이를 짚었을 때 바닥이
대리석인 건물은 매우 위험하다. 나 또한 마모된 고무 패킹을 교환 못한
채 병원 출입문을 열고 들어설 때였다. 싶었던 지팡이가 힘을 잃고
앞으로 밀렸다. 그와 동시에 무게 중심을 잃은 상체가 기웃뚱하며 자세가
떨어졌다.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어 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잘못하였더라면 로비의 딱딱한 대리석과 부딪혀 낙상을
입게 되는 위험이 눈앞에 흰 납별이 반짝임을 느꼈다. 이것이 첫 번째
경험이었다. 20여년 전에는 중소도시에서
부품을 사기 어려웠다. 국립 끝에 인터넷으로 고무 패킹만 사 교체
사용하게 되었다. 얼마 지났을까? 아내와 같이 외출한 날이었다. 약
한시간 정도 걸은 것 같다. 어느덧 다리에 힘이 빠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지팡이의 체중을 씻고 어렵게 걸을 때였다. 바로 앞에 망사 형태의
하수구 덮개가 나타났다. 망사형의 덮개가 지팡이의 패킹보다
작으리라 생각하고 피곤함을 피하지 못하고 가던 중 나의 체중을 실은
지팡이가 순식간에 깊은 하수구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나의
상체가 늪지역에서 물구나무서듯 빠르게 빨려 들어간다. 아찔한 위험 사태를
인지하고 손에 쥐었던 지팡이를 놓아서 사고를 피하였다.
간혹 가족과 외식할 때 식탁 그때 세워 놓으면 마찰 때문에 페인트가
벗겨졌다. 어느 곳에서는 서빙 중 건드려 넘어지기 일수다. 이렇게 지팡이는
보행 장애가 심한 사람들에게 필수품이다. 그러나 장소에 따라
관리가 필요하다. 이렇게 오랜 기간 여러 곳에 모험적인
여행이 가능하였던 것은 바로 지팡이가 있어 가능하였다. 긴 기간 나의
체중에 눌리어 높이 조절 홈의 구멍이 두 배로 확장된 고통의 흉터에도
튼튼하게 곁에서 나의 일상을 함께하고 있다. 이제는 내 손에 익었다.
그래서 어느 것보다 이용이 편하다. 앞으로도 변함 없이 나의 안전한
길잡이다. [음악]
책을 접으며
안녕하세요. 책 읽어 드리는 집사 백종환입니다. 추억의 길.
장애인으로서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묻어 있는 SA 집이지 않았나 싶습니다.이
책의 저자 박철한 작가님은 불의 사고로 장애인이 된 이후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정리한 에세이집이라고 합니다. 추억의 길에 S세이집 전체
53의 글 중 단 여섯 꼭지의 글로 박철한
작가님의 세계를 모두 전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요.
그래 내용이 참으로 담담하고요. 순수해 보이고 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박철한 작가님의 정서를 더 공유하고 싶으시다면 체강권
구입하셔서 조용하게 읽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음악]
장애인으로서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묻어 있는 에세이집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책의 저자 박철한 작가님은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된 이후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정리한 에세이집이라고 합니다. 『추억의 길』 에세이집 전체 53꼭지의 글 중, 단 6꼭지의 글로 박철한 작가님을 세계를 모두 전해 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요. 글의 내용이 참으로 담담하고요. 순수해 보이고 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박철한 작가님의 정서를 더 공유하고 싶으시다면 책 한권 구입하셔서 조용하게 읽어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제목 : 추억의 길
저자 : 박철한
출판사 : 좋은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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