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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

리뷰 시라토리 씨가 두루두루 보는 법

  • 오혜진 문학평론가
  • 등록일 2024-05-29
  • 조회수661

리뷰

‘문학’은 읽고 보는 예술 장르이지만 그것을 ‘시각예술’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음악을 ‘청각예술’이라고 칭하는 일도 드물다. 그런데 유독 미술만은 ‘시각예술’이라는 말로 손쉽게 대체된다. 왜일까. 현대미술에서 ‘시각(성)’이란 그토록 압도적인 요소일까.

다큐멘터리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는 이런 의구심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확장·심화시키는 영화다. 나는 지난 4월 6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미술관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라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상영된 이 영화를 보았다. 주말 오후의 미술관에는 인파가 꽤 몰렸는데, 꼭 미술 관람이 목적은 아닌, 그저 나들이를 나온 듯 보이는 관람객들이 눈에 띄었다.

영화는 전맹, 즉 빛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시라토리 겐지가 일본 각지의 미술관을 방문해 미술작품을 관람하는 모습을 담는다. 영화의 연출자이자 해당 영화의 저본이 된 책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3)를 쓴 가와우치 아리오는 친구 사토 마이코의 소개로 시라토리의 미술 관람에 동행한다.

시라토리가 동행자의 팔꿈치를 가볍게 잡으면 이들의 미술 관람이 시작된다. 이들은 미술관 곳곳을 거닐다가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 선다. 동행자는 눈앞에 있는 작품에서 무엇이 보이는지를 말한다. 다만 미술관에서 제공한 공식적인 정보와 해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때로는 틀리거나 불완전한 정보를 전하게 될 때도 있지만, 이것이 시라토리가 동행자와의 ‘대화’를 통해 미술을 관람하는 방식이다. 그는 미술작품뿐 아니라 동행자와의 대화에 등장하는 침묵, 망설임, 혼돈, 농담 또한 즐겁게 관람한다. 그가 미술보다 미술관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이런 관람방식은 특별하다. 이 방식은 미술관에서 떠들면 안 된다는 엄숙주의적 관습으로부터 이탈하고, 관람자에게 미술작품에 대한 해석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미술계의 권위주의적 규범과도 거리를 둔다. 또한 이 방식은 비장애인의 ‘보기’ 역시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 미술관 직원이 시라토리에게 호수가 그려진 작품에 대해 한창 말하다가 불현듯 그것이 호수가 아니라 들판이었음을 깨달았다는 에피소드(위의 책, 150~161쪽)는 시각과 보는 능력의 관계를 달리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비장애인 역시 작품을 더 자세히 보고 한층 더 자유로운 해석을 시도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관람방식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에 대한 통념을 바꾼다. 이때 비장애인과 장애인은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대방의 관람 경험을 확장하는 상보적 관계다.

영화는 초반부에서 미술작품에 관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들려주기만 한다. 그것이 지금 미술관에서 작품을 관람 중인 시라토리와 친구들의 대화임은 그다음 장면에서야 알 수 있다. 이들이 대화 중 바지락, 바다코끼리, 웅크린 고양이, 이불을 뒤집어쓴 사람의 모습 등으로 다양하게 추측했던 작품의 정체를 관객은 그제야 ‘보게’ 된다. 단행본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역시 일부러 작품에 대한 이들의 대화 내용을 먼저 제시하고, 여러 페이지를 넘긴 후에야 해당 작품의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편집됐다(위의 책, 264~274쪽). 다만, 영화가 작품뿐 아니라 작품을 관람하는 이들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면, 책은 관람현장이 아니라 대화의 대상이 된 해당 작품의 이미지만을 따로 보여준다. 책의 이런 배치는 독자로 하여금 시각(성)이 작품 관람에 개입하지 않는 상황을 체험하게 하면서도, 결국 시각을 관람의 필수 요소로 확정하는 효과를 낳는다.

물론 이런 대화형 관람방식에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시라토리와 함께 미술을 관람한 동행자들은 종종 그에게 ‘작품이 잘 전해졌느냐’, ‘빛과 색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했느냐’와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라토리에게 이는 다소 핵심을 비껴간 질문들이다. 빛과 색을 본 기억이 없는 그에게 빛과 색은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개념으로 존재한다. ‘사과와 노을은 붉은 것’이라는 식이다. 작품이 잘 전해졌느냐는 물음이 ‘지금 비장애인 동행자가 본 작품이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시라토리의 머릿속에도 그려졌느냐’라는 뜻이라면, 대답은 요원할 것이다. 대화형 미술 관람의 목적은 시각장애인과 동행자가 인지하는 작품의 이미지를 일치시키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라토리에게 대화형 미술 관람의 핵심은 미술작품을 경유해, 자신이 세계 속에 있음을 확인하고 타인과 시간을 공유한다는 데 있다.

사실, 영화를 다 보고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내게는 어떤 노파심이 있었다. ‘이 텍스트들이 시각장애인의 미술 관람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결국 말 걸려는 대상은 비장애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영화와 책이 장애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현실을 환기시키고 그에 대한 변혁의 필요성을 비장애인에게 계몽하는 이야기, 장애인에게 유익한 관람방식이 결국 비장애인에게도 영감을 준다는 이야기로 귀결될까 봐 걱정했었다. 비장애인인 연출자·저자가 ‘영화’와 ‘책’이라는 시각 매체를 통해 시각장애인의 경험을 말한다는 형식이 그런 우려를 하도록 만든 요인일지 모른다. 실제로, 시라토리와의 미술 관람이 “내 눈의 해상도를 높여주고” 있다고 쓴 가와우치의 문장이 이 책의 홍보문구로 자주 채택되는 것을 목격했을 때 생각이 좀 복잡해졌다.

하지만 적어도 몇몇 장면들은 내 노파심을 불식시키고 오히려 좀 다른 발상을 해보도록 제안했다. 이를테면 시라토리와 오랜 친구 사이인 호시노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마련된 점자블록 길에 함부로 적치된 자전거 이야기를 한다. 그의 이야기는 시각장애인의 이동을 방해하는 무신경한 이들을 탓하는 내용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런 놈들의 난폭함에 우리는 주눅 들지 않아. 왜냐면 우리가 걷는 길은 그 판 위만이 아니니까! 어디든 갈 수 있어.”라고 호방하게 단언한다. 비장애인도 길 위에서 항상 안전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시라토리의 반문과 공명하는 이 발언은 장애 혐오를 계몽하는 데 몰두하는 대중 서사에서라면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미토예술관에 근무하는 모리야마의 이야기도 인상 깊다. 그 역시 시라토리의 미술 관람이 비장애인인 자신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지만, 그 말의 속뜻은 좀 더 의미심장하다. 단지 시라토리 덕분에 자신도 작품을 더 잘 관람하게 됐다거나, 장애(인)에 관해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됐다는 뜻이 아니었다. 자기 딸에게 다운증후군이 있다고 밝힌 그는, 딸을 임신했을 때 태아의 장애 유무를 판별하는 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시라토리를 비롯한 장애인들과 자주 만나왔기에 장애(인)와 더불어 사는 삶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화형 관람’이라는 자신만의 관람방식을 계발하고 이를 친구들과 공유한 시라토리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장애 극복 서사나 계몽 서사와는 다르다. 거침없이 낯선 길을 가고, 호쾌하게 술에 취하고, 미술관에서 친구와 미술작품을 관람하는 시라토리의 모습은 한 명의 시민이 해당 사회에 속한 존재로서 일상을 누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지당한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지나친 배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 시각 대신 다른 번뜩이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낭만화되거나 비장애인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 묘사되는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시라토리 겐지는 그저 한 명의 미술 관람자로서 미술관에 간다.

‘장애 감수성’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서, 글을 쓸 때마다 내가 혼자 조용히 검토해 보는 것이 있다. 내 글에 ‘본다’라는 단어가 너무 자주 등장하지 않는지 헤아리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관점’ ‘넓은 시야’ ‘눈 밝은 독자’ 같은 비유를 쓸 때 나는 종종 멈칫한다. 때로는 그 단어를 삭제하고 때로는 그냥 둔다. ‘본다’라는 용어가 ‘시각(성)’을 특권화하는 용어로 여겨질 때 나는 그 단어들을 대체할 다른 말을 서둘러 찾았다. 하지만 영화는 시각장애인인 시라토리에게도 당연히 TV는 ‘보는’ 것이고 신문은 ‘읽는’ 것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천수관음이 자신의 모든 신체 기관을 통해 모든 방향을 보고 모든 존재를 두루두루 살피듯(위의 책, 203쪽), ‘보는’ 방식은 단일하지 않다. 시라토리의 대화형 미술 관람은 자신과 타인의 경험을 경유해 세상을 두루두루 ‘보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 글을 퇴고하면서 나는 다른 단어로 바꿔 쓸 수도 있었을 ‘눈’과 ‘본다’라는 단어를 부러 폐기하지 않았다.

  • 8명이 좌식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고 있다. 한 벽면의 통창으로 마당의 푸릇한 잔디가 보인다.

    워크숍을 하는 시라토리 씨

  • 흰지팡이를 손에 든 시라토리씨와 좌우에 선 두 사람이 정면을 향해 서 있다. 벽면에는 반원 모양의 부채가 나란히 한가득 매달려 있다.

    미술관에 간 시라토리 씨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

가와우치 아리오 | 2022 | 107분

다큐멘터리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2022)는 시각장애인 미술애호가 시라토리 겐지가 미술관을 순례하며 겪는 과정들을 담은 가와우치 아리오 감독의 다큐멘터리다. 최근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3)의 저자이기도 한 가와우치 아리오 감독은 동행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작품을 ‘보는’ 시라토리 겐지 씨와 함께 2년여간 직접 미술 전시회를 다니며 작품을 함께 감상했다.
한국 상영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술관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2023.12.22. ~ 2024.4.6., 서울 MMCA영상관)에서 미술관을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논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5편과 함께 이뤄졌다.

· 이음온라인 [문화소식] 공연정보

오혜진

문학평론가. 서사·표상·담론의 성정치를 분석하고 역사화하는 일에 관심 있다.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19호실로부터〉(공저), 〈연구자의 탄생〉(공저), 〈원본 없는 판타지〉(공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 등의 책을 썼다. 현재 성균관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퀴어/페미니즘 문화이론 및 문학비평을 강의한다.
oh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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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국립현대미술관(©2024 ALPS PICTURES INC.)

2024년 6월 (53호)

상세내용

리뷰

‘문학’은 읽고 보는 예술 장르이지만 그것을 ‘시각예술’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음악을 ‘청각예술’이라고 칭하는 일도 드물다. 그런데 유독 미술만은 ‘시각예술’이라는 말로 손쉽게 대체된다. 왜일까. 현대미술에서 ‘시각(성)’이란 그토록 압도적인 요소일까.

다큐멘터리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는 이런 의구심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확장·심화시키는 영화다. 나는 지난 4월 6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미술관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라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상영된 이 영화를 보았다. 주말 오후의 미술관에는 인파가 꽤 몰렸는데, 꼭 미술 관람이 목적은 아닌, 그저 나들이를 나온 듯 보이는 관람객들이 눈에 띄었다.

영화는 전맹, 즉 빛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시라토리 겐지가 일본 각지의 미술관을 방문해 미술작품을 관람하는 모습을 담는다. 영화의 연출자이자 해당 영화의 저본이 된 책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3)를 쓴 가와우치 아리오는 친구 사토 마이코의 소개로 시라토리의 미술 관람에 동행한다.

시라토리가 동행자의 팔꿈치를 가볍게 잡으면 이들의 미술 관람이 시작된다. 이들은 미술관 곳곳을 거닐다가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 선다. 동행자는 눈앞에 있는 작품에서 무엇이 보이는지를 말한다. 다만 미술관에서 제공한 공식적인 정보와 해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때로는 틀리거나 불완전한 정보를 전하게 될 때도 있지만, 이것이 시라토리가 동행자와의 ‘대화’를 통해 미술을 관람하는 방식이다. 그는 미술작품뿐 아니라 동행자와의 대화에 등장하는 침묵, 망설임, 혼돈, 농담 또한 즐겁게 관람한다. 그가 미술보다 미술관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이런 관람방식은 특별하다. 이 방식은 미술관에서 떠들면 안 된다는 엄숙주의적 관습으로부터 이탈하고, 관람자에게 미술작품에 대한 해석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미술계의 권위주의적 규범과도 거리를 둔다. 또한 이 방식은 비장애인의 ‘보기’ 역시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 미술관 직원이 시라토리에게 호수가 그려진 작품에 대해 한창 말하다가 불현듯 그것이 호수가 아니라 들판이었음을 깨달았다는 에피소드(위의 책, 150~161쪽)는 시각과 보는 능력의 관계를 달리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비장애인 역시 작품을 더 자세히 보고 한층 더 자유로운 해석을 시도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관람방식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에 대한 통념을 바꾼다. 이때 비장애인과 장애인은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대방의 관람 경험을 확장하는 상보적 관계다.

영화는 초반부에서 미술작품에 관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들려주기만 한다. 그것이 지금 미술관에서 작품을 관람 중인 시라토리와 친구들의 대화임은 그다음 장면에서야 알 수 있다. 이들이 대화 중 바지락, 바다코끼리, 웅크린 고양이, 이불을 뒤집어쓴 사람의 모습 등으로 다양하게 추측했던 작품의 정체를 관객은 그제야 ‘보게’ 된다. 단행본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역시 일부러 작품에 대한 이들의 대화 내용을 먼저 제시하고, 여러 페이지를 넘긴 후에야 해당 작품의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편집됐다(위의 책, 264~274쪽). 다만, 영화가 작품뿐 아니라 작품을 관람하는 이들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면, 책은 관람현장이 아니라 대화의 대상이 된 해당 작품의 이미지만을 따로 보여준다. 책의 이런 배치는 독자로 하여금 시각(성)이 작품 관람에 개입하지 않는 상황을 체험하게 하면서도, 결국 시각을 관람의 필수 요소로 확정하는 효과를 낳는다.

물론 이런 대화형 관람방식에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시라토리와 함께 미술을 관람한 동행자들은 종종 그에게 ‘작품이 잘 전해졌느냐’, ‘빛과 색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했느냐’와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라토리에게 이는 다소 핵심을 비껴간 질문들이다. 빛과 색을 본 기억이 없는 그에게 빛과 색은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개념으로 존재한다. ‘사과와 노을은 붉은 것’이라는 식이다. 작품이 잘 전해졌느냐는 물음이 ‘지금 비장애인 동행자가 본 작품이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시라토리의 머릿속에도 그려졌느냐’라는 뜻이라면, 대답은 요원할 것이다. 대화형 미술 관람의 목적은 시각장애인과 동행자가 인지하는 작품의 이미지를 일치시키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라토리에게 대화형 미술 관람의 핵심은 미술작품을 경유해, 자신이 세계 속에 있음을 확인하고 타인과 시간을 공유한다는 데 있다.

사실, 영화를 다 보고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내게는 어떤 노파심이 있었다. ‘이 텍스트들이 시각장애인의 미술 관람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결국 말 걸려는 대상은 비장애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영화와 책이 장애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현실을 환기시키고 그에 대한 변혁의 필요성을 비장애인에게 계몽하는 이야기, 장애인에게 유익한 관람방식이 결국 비장애인에게도 영감을 준다는 이야기로 귀결될까 봐 걱정했었다. 비장애인인 연출자·저자가 ‘영화’와 ‘책’이라는 시각 매체를 통해 시각장애인의 경험을 말한다는 형식이 그런 우려를 하도록 만든 요인일지 모른다. 실제로, 시라토리와의 미술 관람이 “내 눈의 해상도를 높여주고” 있다고 쓴 가와우치의 문장이 이 책의 홍보문구로 자주 채택되는 것을 목격했을 때 생각이 좀 복잡해졌다.

하지만 적어도 몇몇 장면들은 내 노파심을 불식시키고 오히려 좀 다른 발상을 해보도록 제안했다. 이를테면 시라토리와 오랜 친구 사이인 호시노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마련된 점자블록 길에 함부로 적치된 자전거 이야기를 한다. 그의 이야기는 시각장애인의 이동을 방해하는 무신경한 이들을 탓하는 내용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런 놈들의 난폭함에 우리는 주눅 들지 않아. 왜냐면 우리가 걷는 길은 그 판 위만이 아니니까! 어디든 갈 수 있어.”라고 호방하게 단언한다. 비장애인도 길 위에서 항상 안전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시라토리의 반문과 공명하는 이 발언은 장애 혐오를 계몽하는 데 몰두하는 대중 서사에서라면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미토예술관에 근무하는 모리야마의 이야기도 인상 깊다. 그 역시 시라토리의 미술 관람이 비장애인인 자신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지만, 그 말의 속뜻은 좀 더 의미심장하다. 단지 시라토리 덕분에 자신도 작품을 더 잘 관람하게 됐다거나, 장애(인)에 관해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됐다는 뜻이 아니었다. 자기 딸에게 다운증후군이 있다고 밝힌 그는, 딸을 임신했을 때 태아의 장애 유무를 판별하는 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시라토리를 비롯한 장애인들과 자주 만나왔기에 장애(인)와 더불어 사는 삶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화형 관람’이라는 자신만의 관람방식을 계발하고 이를 친구들과 공유한 시라토리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장애 극복 서사나 계몽 서사와는 다르다. 거침없이 낯선 길을 가고, 호쾌하게 술에 취하고, 미술관에서 친구와 미술작품을 관람하는 시라토리의 모습은 한 명의 시민이 해당 사회에 속한 존재로서 일상을 누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지당한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지나친 배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 시각 대신 다른 번뜩이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낭만화되거나 비장애인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 묘사되는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시라토리 겐지는 그저 한 명의 미술 관람자로서 미술관에 간다.

‘장애 감수성’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서, 글을 쓸 때마다 내가 혼자 조용히 검토해 보는 것이 있다. 내 글에 ‘본다’라는 단어가 너무 자주 등장하지 않는지 헤아리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관점’ ‘넓은 시야’ ‘눈 밝은 독자’ 같은 비유를 쓸 때 나는 종종 멈칫한다. 때로는 그 단어를 삭제하고 때로는 그냥 둔다. ‘본다’라는 용어가 ‘시각(성)’을 특권화하는 용어로 여겨질 때 나는 그 단어들을 대체할 다른 말을 서둘러 찾았다. 하지만 영화는 시각장애인인 시라토리에게도 당연히 TV는 ‘보는’ 것이고 신문은 ‘읽는’ 것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천수관음이 자신의 모든 신체 기관을 통해 모든 방향을 보고 모든 존재를 두루두루 살피듯(위의 책, 203쪽), ‘보는’ 방식은 단일하지 않다. 시라토리의 대화형 미술 관람은 자신과 타인의 경험을 경유해 세상을 두루두루 ‘보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 글을 퇴고하면서 나는 다른 단어로 바꿔 쓸 수도 있었을 ‘눈’과 ‘본다’라는 단어를 부러 폐기하지 않았다.

  • 8명이 좌식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고 있다. 한 벽면의 통창으로 마당의 푸릇한 잔디가 보인다.

    워크숍을 하는 시라토리 씨

  • 흰지팡이를 손에 든 시라토리씨와 좌우에 선 두 사람이 정면을 향해 서 있다. 벽면에는 반원 모양의 부채가 나란히 한가득 매달려 있다.

    미술관에 간 시라토리 씨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

가와우치 아리오 | 2022 | 107분

다큐멘터리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2022)는 시각장애인 미술애호가 시라토리 겐지가 미술관을 순례하며 겪는 과정들을 담은 가와우치 아리오 감독의 다큐멘터리다. 최근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3)의 저자이기도 한 가와우치 아리오 감독은 동행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작품을 ‘보는’ 시라토리 겐지 씨와 함께 2년여간 직접 미술 전시회를 다니며 작품을 함께 감상했다.
한국 상영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술관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2023.12.22. ~ 2024.4.6., 서울 MMCA영상관)에서 미술관을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논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5편과 함께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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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혜진

문학평론가. 서사·표상·담론의 성정치를 분석하고 역사화하는 일에 관심 있다.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19호실로부터〉(공저), 〈연구자의 탄생〉(공저), 〈원본 없는 판타지〉(공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 등의 책을 썼다. 현재 성균관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퀴어/페미니즘 문화이론 및 문학비평을 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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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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