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전통자수는 멀리서 보면 그림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다른 세계다. 붓으로 그은 선처럼 보였던 산의 능선, 새의 깃털, 구름의 흐름, 꽃잎의 결이 모두 ‘실’로 수놓아졌기 때문이다. 이정희 작가의 자수 작품은 바로 그 지점에서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는다. 한 폭의 그림처럼 감상하다가도, 곧 이것을 모두 바늘과 실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감상의 방향이 달라진다.
전통자수는 궁중의 침선장이 제작한 ‘궁중 자수(궁수, 宮繡)’와 백성이 삶 속에서 만들어 온 ‘민간 자수(민수, 民繡)’로 나뉘는데, 이정희 작가는 두 가지 다 작품화하고 있다. 이정희 작가는 민간 자수의 질박하고 단순한 매력에 이끌려 정옥순 선생에게 입문해 배우게 되었고, 질서 있고 장식성 있는 기법과 색상에 대한 열망으로 20대 중반에 한상수 자수장에게 궁중 자수를 사사받았다고 한다. 민수, 궁수 모두 의미 있었지만, 작가는 화려함과 절제, 균형미를 지닌 궁수에서 답을 찾았다. 이를 통해 예술적 경지의 절정에 이르렀고, 2022년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자수장 보유자로 지정받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궁중 자수의 정교함, 민간 자수의 해학을 담다
궁중 자수의 특징은 화려함에 일정한 격식과 상징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흉배 계열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흉배는 조선시대 관복의 가슴과 등에 부착하던 장식으로, 착용자의 신분과 품계를 상징한다. 이정희 작가의 흉배 작품은 작지만 강한 화면을 보여준다. 네모난 화면 안에 학, 호랑이, 구름, 파도, 산, 꽃 등의 요소가 촘촘히 배치되어 있으며, 각각의 문양은 장식인 동시에 길상 등 의미를 지닌다. 특히 〈금사 쌍학 흉배〉는 금빛 실의 효과가 두드러진다. 학은 장수와 고결함을 상징하는 새로 자주 등장하는데, 금사로 표현된 날개와 구름 문양은 화면을 매우 화려하게 만들고 있다. 그 화려함은 무질서하게 번쩍이는 방식이 아니라, 좌우 대칭과 반복 문양 속에서 정돈되어 있다. 반면 〈쌍호도 무관 흉배〉는 호랑이의 표정과 몸짓이 강렬하다. 호랑이는 용맹과 권위를 상징하는데, 민화적 표현이 더해지면서 다소 익살스러운 느낌도 준다. 이정희 작가의 흉배 작품은 궁중의 격식과 민화의 생동감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준다.
민간 자수 작품은 자유롭고 친근한 매력이 있다. 작가는 민간 자수 작품을 “소박하지만 해학적인 매력”으로 표현한다. 이런 특징은 호작도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호랑이는 본래 위엄 있는 동물이지만, 민화 속 호랑이는 종종 익살스럽고 인간적인 표정을 짓는다. 까치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새로 여겨져 호랑이와 함께 자주 등장한다. 이정희 작가의 호작도 〈까치와 호랑이〉 역시 무섭기만 한 호랑이가 아니라, 미소 지으며 바라볼 수 있는 존재다. 눈, 입, 몸의 무늬, 꼬리의 곡선이 장식적이면서도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민간 자수의 재미는 완벽한 사실 묘사보다 ‘느낌’에 있다. 실제처럼 정확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호랑이를 바라본 사람들의 상상과 감정이 담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정희 작가는 이러한 민화적 감각을 자수로 옮기면서, 선의 굵기와 색의 대비를 통해 해학적인 분위기를 살렸다. 전통은 때로 웃음과 친근함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있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고 까치가 날아다니는 모습은 그 절정이다.
흉배와 궁중 계열 작품에서는 격식과 화려함이 강조되고, 호작도나 풍속도 계열 작품에서는 더 자유롭고 친근한 분위기가 드러난다. 이정희 자수장의 작품에는 이 두 세계가 함께 제시되어 전통자수의 폭과 깊이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정희, 〈금사 쌍학 문관흉배〉, 20×22cm,
실크천, 명주실, 금사, 2014년
이정희, 〈까치와 호랑이〉, 23×50cm, 실크천,
명주실, 2020년
전통 문양의 의미를 살리다
학, 호랑이, 봉황, 모란, 연꽃, 원앙, 십장생, 수복 문자 등은 모두 전통문화의 주된 소재다. 이정희 자수장은 이 소재를 단순히 예쁜 무늬로 사용하는 것에 더하여, 그 안에 담긴 기원과 상징을 작품화했다. 〈화조도〉, 〈목단〉, 〈봉황과 나리꽃〉, 〈꽃과 새〉, 〈초충도〉 등 꽃과 새, 풀벌레를 소재로 한 작품도 다채롭다. 이 작품들은 비교적 친근한 소재를 다루지만, 결코 단순한 장식화에 머물지 않는다. 꽃은 계절과 생명력을 상징하고, 새는 움직임과 소리를 상상하게 한다. 실제 소리는 없지만, 새의 방향, 날개의 각도, 가지의 기울기만으로 화면이 기운생동한다. 〈화조도〉 병풍은 여러 폭에 걸쳐 꽃, 나무, 새, 물가의 생물이 배치된 작품이다. 제작하는 데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각 폭이 독립된 장면처럼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자연 세계다. 병풍을 통해 마치 계절의 풍경을 산책하듯 감상할 수 있다. 새가 앉은 가지, 물가의 오리, 꽃이 핀 나무는 모두 정적인 대상이지만, 자수의 선과 색이 더해지면서 화면이 살아 움직인다.
길상 문양은 복, 장수, 부귀, 평안, 출세, 다산 등 좋은 뜻을 담은 문양이다. 이정희 작가의 작품 중 〈길상도〉, 〈백수백복〉, 〈십장생〉, 〈목숨 수〉, 〈복 복〉, 〈연꽃 원앙〉 등은 제목만 보아도 인간의 보편적인 희망을 담은 소재임을 알 수 있다. 〈백수백복〉은 ‘수’와 ‘복’이라는 글자를 중심으로 장수와 복을 기원한다. 글자는 단순한 문자 정보를 넘어 문양으로도 기능한다. 한 글자가 반복될 때, 의미도 반복되고 시각적 리듬도 생긴다. 옛적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가 정화수에 물을 떠 놓고 반복적으로 빌던 의식처럼, 반복은 정성과 염원의 축적이다. 〈십장생〉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전통 소재를 다룬다. 해, 산, 물, 구름, 소나무, 학, 거북, 사슴, 불로초 등 장수를 상징하는 요소들이다. 십장생 작품은 전통자수 감상의 좋은 출발점이다. “이 문양이 예쁘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이 소재가 반복해서 등장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장식을 넘어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시각 언어로 승화된다.
이정희, 〈화조도〉 병풍, 34×75cm, 6폭, 표구 크기 264×150cm, 실크천, 명주실, 꼰사, 1994년
회화성과 공예성의 균형과 조화를 담다
이정희 작가의 작품을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면의 회화적 구성이다. 제작에만 약 3년이 걸린 대작으로 이정희 작가의 대표작이기도 한 〈청룡백호도〉 병풍은 청룡과 백호, 산과 물, 구름, 파도, 소나무를 한 화면 안에서 웅장하게 펼친다. 멀리서 보면 산수화나 민화 병풍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직물 위에 실을 한 땀 한 땀 놓아 완성한 자수 작품이다. 산의 능선은 색실의 농담으로 부드럽게 이어지고, 파도는 반복되는 곡선으로 율동감을 자아낸다. 청룡과 백호는 화면 양쪽에서 상징적 존재감을 드러내며 작품 전체에 긴장감과 생동감을 부여한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무서운 동물’이나 ‘상서로운 동물’을 단순히 크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 전체의 질서 속에 배치한 점이다. 청룡은 구름과 함께 움직이고, 백호는 산수의 한 부분처럼 자리 잡았다. 이러한 배치로 이 작품은 동물 그림이라기보다, 하늘과 땅, 산과 물, 상상 속 존재와 현실의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세계다. 먼저 큰 구도를 보고, 그다음에 산의 결, 파도의 흐름, 구름의 말림, 동물의 털 표현을 차례로 따라가며 작품을 읽는 재미를 더할 수 있다.
이정희 자수장의 작품에서 주목할 부분은 색의 사용이다. 물감을 섞어 중간색을 만드는 회화와는 달리, 자수는 실의 색을 선택하고 겹치게 표현하며 색의 변화를 표현한다. 따라서 색의 변화는 실의 방향, 굵기, 밀도에 따라 달라진다. 이정희 자수장의 꽃 표현은 선명한 색을 사용하면서도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꽃잎의 안쪽과 바깥쪽, 줄기와 잎의 방향, 새의 깃털 등이 가까이 볼수록 공예적 완성도가 드러난다. 그림이 붓질의 흔적을 남긴다면, 자수는 바늘땀의 시간을 남기는 것이다. 또한 이정희 작가의 자수는 색채가 선명하고 장식성이 강하다 특히 금사, 붉은색, 청색, 녹색, 황색 등 전통적으로 상징성이 강한 색들이 화면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색을 단순히 화려하게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문양의 의미와 화면의 균형을 위해 조절되고 있다.
이정희, 〈청룡백호도〉 병풍, 60×108cm, 8폭, 표구 크기 496×185cm, 실크천, 명주실, 꼰사, 2003년
전승과 창작의 공존
43여 년 동안 이어온 이정희 작가의 작업은 전통적 기법 위에 오늘날의 시대적 감각을 더한 창의성을 아우른다. 일례로 〈길상도〉는 차분한 바탕 색감의 고정관념을 깨고 싱그럽고 현대적인 색감으로 표현하고, 문자 사이마다 도상을 넣어 리듬감 있는 조형감이 시각적 재미를 준다.
작가의 작품에는 병풍과 액자뿐 아니라 좌탁, 좌경, 장신구, 수젓집, 반짇고리와 같은 생활공예 작품도 있다. 이는 작가의 자수가 전시장 벽에 걸리는 감상용 작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옷, 주머니, 보자기, 혼수품, 생활용품 등에 수를 놓으며 아름다움과 쓰임을 함께 추구한 생활 도구들이다. 이정희 작가의 생활공예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작은 면적 안에 자수의 장식성과 기능성이 밀도 있게 담긴다는 것이다. 병풍처럼 큰 화면에서는 장대한 구성이 중요하지만, 수젓집이나 반짇고리 같은 작은 물건에서는 문양 하나, 색 하나가 더욱 또렷하다. 작은 물건일수록 바느질의 밀도와 마감이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하게 된다. 이정희 작가의 생활공예 작품은 전통자수가 일상 속 물건을 어떻게 특별하게 변환·재생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자수를 “옛날 방식의 그림”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길상도〉 작업 사진
이정희, 〈보상화 팔각탁자〉, 지름 46, 둘레 200, 원목 70cm, 실크천, 명주실, 꼰사, 2000년
시간의 축적 위에 실로 그린 그림
자수는 손으로 만든 시간이 축적된 물건이며, 쓰임과 아름다움이 함께하는 공예다. 이정희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에도 마음과 시간,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더한다. 이정희 작가의 자수 작품에는 그의 인생처럼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한 땀 한 땀 쌓여 있다. 한 올의 실이 만들어 내는 변화는 작가가 평생 이어 온 꿈의 실현이기도 하다. 실 한 올은 작고 가늘지만, 반복되고 쌓이면 산이 되고 물이 되고 꽃이 되고 새가 된다. 그 안에는 장인의 손끝, 전통의 시간, 사람들의 바람이 함께 수놓아진다. 이정희 작가의 자수 세계는 전통자수에 담긴 의미와 아름다움을 되살리고, 격식과 자유로움, 화려함과 절제가 어우러진 화면 속에 이를 섬세하게 담아 오늘의 공예 안에 이어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정희
자수공예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자수장(궁수).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초대작가, 온고을전통공예대전 초대작가 등 국내외 다수의 개인전 및 초청전에 참여했다. 1996년 전북전통공예대전 특선을 시작으로, 1998년 제30회 신사임당 기념대회 자수부에서 1등상, 2010년 올해의 장애인 상(대통령상), 2013년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대통령상), 2024년 정읍시민의장 문화체육장 등 다수 수상했다. 나사렛대학교 겸임교수와 평생교육원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썼고, 진안자수박물관장, (사)한국노동문화협회 전북지부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장애인미술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2013년 대한민국 황실명장으로 선정되었고, 2022년에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자수장 궁수(2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북 정읍에서 ‘전통자수 예다움’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과 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ijh69460@daum.net

안태욱
1987년부터 2024년까지 국가유산진흥원에 재직하면서 무형유산 보전 및 진흥을 위한 전시와 공연기획, 국제교류를 비롯하여 문화유산 활용 사업인 경복궁 등 궁궐 의례와 왕릉 등 행사 복원 사업을 담당하였다. 현재는 서울시 무형유산위원 및 박물관미술관 정책위원, 경주세계유산축전,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경주 대릉원 총감독으로 활동하며 국가유산청 무형유산 보전 및 진흥계획 수립에 참여 중이다.
silkroadkr@naver.com
사진 제공.이정희 자수장
2026년 6월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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