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웹진 이음

리뷰 배소현(스라소니가 온다) 〈정원사와의 산책〉 동질하지 않은 관계성으로 산책하기

  • 루인 트랜스젠더퀴어 공부노동자
  • 등록일 2025-02-05
  • 조회수 24

리뷰

총 9개 장, 공연 시간 180분으로 구성된 연극 〈정원사와의 산책〉에는 세 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장애인이며 자살생존자 검은새/박지후(권은혜 분), 트랜스젠더 가드너/강이명(배선희 분), 그리고 데이터(이리 분)가 그 셋이다. 검은새와 가드너는 앱을 통해 만나 소통하고 트위터를 통해 각자의 속도로 서로와 연결된다. 또한 수차례 자살 시도를 했고 정신병을 겪고 있으며, 종종 공황을 겪는다. 그들의 실제 나이는 모르지만 17살에 머물며 혈연 가족이 아니라 폰을 통해 연결된 “폰 끝에 걸려 있는 세상”을 가족으로 관계 맺고 있다. 하지만 검은새는 아버지의 자살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으며, 가드너는 양육자의 거부와 냉대에 직접 양육자를 “버려드린” 뒤 그 상처를 갖고 있다.

이 연극은 “인간동물”인 가드너와 검은새의 연결, 대화, 그리고 모잠비크에서 일식을 보는 상상으로 구성된다. 둘은 서로의 역사를 듣고 사회적 차별에 함께 분개한다. 또한 깊은 상처와 죽고 싶은 마음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서로를 살리기 위해 자신도 살아야 하는 과업을 약속한다. 하지만 영향을 끼치는 둘은 데이터로만 연결되어 있기에 상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상대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를 알 수 없다.

연극을 소개한 영상에는 연극을 준비하며 캐런 바라드를 공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의 핵심은 ‘우리는 모두 얽혀 있다는 관계적 세계’다. 바라드 논의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양자역학의 세계는, 인과성으로 논하는 역학의 세계와 달리, 관계성으로 논한다. 또한 역학의 세계에서 태양은 내가 잘 때도 존재하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태양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가드너와 검은새가 관계 맺는 방식 그 자체이기도 하다. 가드너와 검은새는 데이터로 연결되기 전까지는 상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검은새는 가드너의 답장이 없자 생사를 알 수 없어 불안해한다. 둘은 오늘 하루도 죽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관계성을 만들어가지만, 그 관계는 인과적이지 않고 집단적이지 않다.

등장인물(?)로서 데이터는 이런 이유로 매우 중요하다. 데이터는 가드너와 검은새의 말을 따라 읽고, 둘의 상황을 설명하고, 가드너와 검은새보다 먼저 그들의 감정을 말하고, 한 곳에 고정되어 있기보다 공연장 모든 곳에 존재한다. 데이터는 가드너이기도 하고 검은새이기도 하며, 검은새와 가드너를 연결하는 동시에 가드너와 검은새의 바깥에 위치한다. 데이터의 이런 복잡한 위치는 또한 검은새와 가드너의 정신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데이터는 이 연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주목할 관계 변동은 오늘 하루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뒤, 혹은 모잠비크로 (상상의) 여행을 다녀온 뒤 다시 시작된다. 공연을 시작할 때 배우들은 대피처 등 안전과 관련한 안내를 하는데 그중 “이 공연은 종종 지연되며 다시 시작한다”라고 말한다. 매번 새롭게 갱신되는 것은 관계성의 내용이기도 하지만 연극의 흐름이기도 한데, 검은새가 가드너에게 자신이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라고 밝히며 연극은 다시 시작한다. 오프라인으로 만나지 않으니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가드너와의 관계를 이전과는 달라진 형태로 시작하기 위해서다. 휠체어를 탄다는 말과 함께 검은새는 모든 사람은 “잠재적 시체”인데 왜 장애 여부로 한 개인의 전 생애와 존재성이 규정되어야 하는지를 문제 삼고, “망할 젠더가 훨씬 더 아프다”라고 말한다. 가드너가 이 말의 의미를 묻자, 정하는 순간 어긋난다고 설명하는데, 이 말은 하나의 범주로 존재성, 관계성이 규정되기를 원치 않는 태도이자 이 연극의 중요한 키워드다. 연극에서 검은새는 휠체어를 탄다고만 밝혔지 어떤 장애인지 말하지 않았고, 무대에서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도 질문을 받는다. 지금까지 검은새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장애인 인물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느냐고. 휠체어라는 장애 기호는 어떻게 장애를 단일한 형태로 상상하는 문제적 관습이 되느냐고.

검은새의 이야기는 가드너가 자신을 “트으래앤스으”라고 말하지 않는 계기가 된다. 가드너는 트위터 프로필에 트랜스젠더 자긍심 깃발 이미지를 적어뒀지만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직접 말하기는 어려워한다. 자신이 정신장애일지, 성별장애일지 몰라 괴로웠다며 트랜스를 말할 때마다 “트으래앤스으”라고 망설이고 지연하듯 말한다. 가드너의 이야기를 듣던 검은새는 “나는 내가 트랜스가 아니라 그런가, 쉬운데? 연습하자 트랜스! 트랜스!”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공연을 또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하며, 가드너는 검은새의 제안에 따라 트랜스젠더를 망설임 없이, 큰 소리로, 수차례 외친다. 그리하여 연극은 동질성 없는 공감과 연대를 만든다.

공감과 연대는 정체성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경험이 있을 때만 가능할까? 정체성의 교차는 개인이 체화할 때만 실현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둘은 자살과 관련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지만 동일하지 않고, 생애 경험이 다르며, 정체성 역시 다르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 쉬운 것’은 나 아닌 다른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상대방의 어려움을 함께 연습할 수 있는 용기를 진지하게 공유할 수 있어서다. 이것이 이 공연이 재현하는 연대이기도 하다.

이 연극의 장애 범주, 트랜스 범주, 그리고 관계성은 단순히 한 명의 배우가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역할, 또 다른 배우가 트랜스 역할을 하는 것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연극은 몇 개의 스크린을 통해 모든 대사를 자막으로 송출한다. 이 자막은 한편으로 모든 관객이 배우의 대사를 수월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연극에 대한 접근성이다. 하지만 이 공연에서 자막은 배우도 볼 수 있게 해두었다. 배우는 실수 없이 대사를 다 암기해야 하는 걸까? 배우도 나이 들고, 질병이 있거나 장애가 있어서, 혹은 이런저런 이유가 없어도 암기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대사를 완벽하게 암기해야 관객에게 감동과 연극의 완결성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관객에게 접근성을 제공하는 만큼 배우에게도 접근성을 제공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공연은 관객과 배우 모두에게 자막을 제공함으로써 연극 속 인물 사이의 관계성만이 아니라 관객과 배우의 관계성도 다시 고민할 수 있게 한다. 이 관계성에 관객이 연루될 때, 불안과 공황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정신병과 장애와 트랜스 사이의 관계를 계속해서 질문하게 한다. 그러니 정원 없는 정원사 가드너와 외출이 어려운 검은새의 상상 속 산책은 바로 중첩된 관계를 산책하는 것이기도 하다.

  • 가드너와 검은새가 무대 양쪽에 서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들 사이에 데이터가 쭈그려 앉아 있다.
  • 데이터가 무대 중앙에 앉아 있고, 뒤쪽에 검은새가 벤치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다. 데이터는 하얀 비니를 쓰고 “차별금지법 제정하라”라고 쓰여 있는 티셔츠를 입고 무지개색 망토를 두르고 있다.
  • 가드너가 무릎을 양팔로 감싸안은 채 앉아 있다. 옆에 텀블러와 노트북이 놓여 있고, 벽에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그림자가 있다.
  • 검은새가 벤치에서 내려와 바닥에 두 발을 뻗고 앉아 있다. 여러 개의 녹색원 조명이 공간을 비추고 있다.
정원사와의 산책

정원사와의 산책

배소현(스라소니가 온다)|2024.12.13.~12.15.|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정원사와의 산책〉은 서투르지만 진실한 관계 맺기를 경험하며 움트는 작은 용기에 관한 이야기다. 매일 가까스로 죽음을 밀어내는 자살 고위험군 인간-동물 ‘검은새’와 ‘가드너’가 자신들의 몸이 놓인 사각지대에서 벌이는 조용한 고투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사회적 고립 속에서 살아간다. 살기 위해 스마트폰을 쥐고 있다. 소셜미디어와 채팅 앱들은 이들이 세상과 연결되는 마지막 접촉면이다. 이들의 고립은 퀴어함과 우울, 정신질환, 장애와 자본적 억압이라는 사회적 약자성으로 촘촘하게 얽히며 교차한다. 담론 이전에 지금 가능한 실천으로써, 이 몸들을 ‘일단 오늘’ 살려내는 것은 무엇일까?

∙ 전시정보 : 이음온라인 문화소식

루인

루인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소장이며,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상근활동가다. 20년 넘게 트랜스젠더퀴어 인권운동 언저리에서 트랜스젠더퀴어 페미니즘 인식론을 언어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최근 『퀴어 한국사: 1일 1페이지 퀴어한 역사 읽기』를 함께 썼다.
runtoruin@gmail.com

사진 제공.스라소니가 온다(ⓒ 황호규)

2025년 2월 (61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제공하는 자료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 4유형 : 출처표시,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의 조건에 따라 이용이 가능합니다.

댓글 남기기

제 2021-524호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WA-WEB 접근성 (사)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 | 1.업체명: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고 112 3.웹사이트:http://www.ieum.or.kr 4.유효기간:2021.05.03~2022.05.02 5.인증범위:이음 온라인 홈페이지 | 「지능정보화 기본법」 제47조제1항 및 같은 법 시행규칙 제9조제5항에 따라 위와 같이 정보통신접근성 품질인증서를 발급합니다. 2021년 05월 03일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