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처음에 저는 플라멩코가 어떤 춤인지 전혀 몰랐어요. 들어보지도 못했고, 그냥 스페인 춤?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직접 가서 알아보니 제가 배우기에는 너무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시작을 하고 나서, 플라멩코 기본 동작을 다 배우고 나니 바로 작품에 들어갔어요. 작품을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진짜 문제가 시작되었죠. 기본 동작은 정말 단순하잖아요. 근데 작품은 전혀 다르더라고요. 느낌도 필요하고, 또 골반과 팔, 어깨 쓰는 거, 이런 모든 게 어려웠어요. 예를 들어, 선생님이 팔을 올리라고 했다면,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여러 방법이 있잖아요. 위로 돌리면서 올리라는 건지, 왼쪽으로 가서 위로 올리라는 건지, 그냥 원으로 돌리라는 건지 도통 감을 못 잡겠는 거예요. 골반 같은 경우도 골반을 어떻게 쓰는지는 말해주시는데, 그걸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너무 답답했어요. 춤을 추는 선생님의 골반을 직접 만져보고 나서야 어떤 느낌인지 알았어요. 속으로 ‘아, 1시 방향으로 움직여서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움직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약간 미묘하게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 장애무용수 김희량 님 인터뷰 중에서
시각장애 무용수를 위한 대체감각 전달 장치 연구 과정
2024년 8월 17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수를 세는 사람들〉 공연이 무대에 올랐다. 이 공연은 2021년부터 시작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콘텐츠진흥원 연구 사업의 최종 결과물이다. 연구 사업의 공식 명칭은 ‘시청각 장애인의 문화예술 창작 및 협업 지원 기술 개발’이고, 시청각장애 무용수를 위한 예술 창작 지원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카이스트 기계공학과와 문화기술대학원, 연세대학교, (주)비햅틱스, (사)빛소리친구들이 모여 연구 사업을 시작하였다. 전문 장애무용수를 위한 대체감각 전달 장치를 4년에 걸쳐 개발하고, 그 장비를 활용해 공연을 만들고, 마지막 해에 무대에 올리면 연구 과제는 공식적으로 종료된다.
4년에 걸친 연구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단계에서 시청각장애를 가진 무용수들이 춤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겪는 불편함을 파악하였다. 이를 위해 여러 차례 무용수들을 직접 인터뷰하며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듣고, 이해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2단계에서는 센서와 햅틱(Haptic) 기술 개발에 중점을 두었다. 햅틱은 스마트 디바이스나 게임기 등을 사용하는 사람이 촉각과 운동감을 느끼게 해주는 기술로, 주로 힘·진동·모션으로 촉각을 전달한다. 3단계에서는 이러한 센서와 햅틱을 AI와 결합해 무용수가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는 수트 형태로 제작하였다. 올해 4단계에서는 이렇게 개발한 장비를 활용하여 유선식 안무가와 함께 무용 작품을 창작했다. 이 연구 프로젝트는 무용 분야에서 시도된 최초의 작업이며 장애무용수를 위한 예술지원 기술 개발이라는 큰 사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 크게 기여한 김희량 무용수는 플라멩코를 배우면서 춤을 시작한 장애무용수이다. 그녀는 후천성 중증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 동작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손・팔・어깨・골반・다리를 따로따로 만져보고, 동작에 대한 설명을 듣고 느끼면서 동작을 기억하였고, 기억한 것은 머릿속에서 조립하고 상상해 가며 동작을 만들어 보았다. ‘아, 이런 몸짓이겠구나!’ 다음날 연습실에 가서 안무가에게 자신이 상상한 동작이 맞는지 확인해 보면, 손목은 더 꺾어서 돌려야 하고 팔은 더 높이 들어올려야 했으며, 가슴은 더 들고 턱은 더 당겨야 했다.
농당스? 모두를 위한 춤!
장애인의 신체를 여과 없이 드러낸 작품으로 제롬 벨의 〈장애극장(Disabled Theater)〉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스위스의 장애인극단 호라(Theater HORA)와 제롬 벨이 함께 만든 이 작품은, 기존 무용 교육을 받은 무용수라면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하지 않을 많은 움직임이 포착된다. 무대에 올라선 무용수들이 극장 조명에 눈이 부셔 몸을 움츠린다거나, 한 명씩 등장한 무용수들이 움직임 없이 1분간의 침묵을 한 채 관객들을 내려다본다거나, 자신의 이름・나이・직업, 그리고 장애를 말하고 직접 창작한 춤을 추며 이 공연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한다. 장애인의 성생활을 암시하는 듯한 동작까지.
한 기사에 따르면, 이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불안감이 들었다고 말한다.(주1) 무대에 올라선 무용수들은 모두 자신의 직업을 ‘배우’라고 말하지만, 이 공연에서 그들은 연기하지 않는 듯하다. 원래 장애가 있는 신체 움직임 자체가 그러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연습했다. 즉, 연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춤이라고 믿는 그 움직임이 아닌 것을 사실적으로 드러냈을 때, 무엇을 춤이라고 말해야 할까. 농당스(non-danse)(주2)의 선구자로 알려진 제롬 벨이기에 그의 작품은 춤으로 분류되지 않는 많은 신체와 움직임을 작업에 쓴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인터뷰했던 청각장애 무용수 김영민은 “춤을 출 때 음악에서 벗어나 한순간만이라도 자유롭게 움직여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 춤은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 같은, 많은 한계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름을 존중하고 차이를 좁히는 창작
〈수를 세는 사람들〉 작품 속 장애무용수들은 동작 연습 이외에도 장비에 대한 이해와 사용법을 익히는 시간을 가졌고, 센서-햅틱 장비를 사용하여 무대 위 공간과 방향을 인스트럭터(지도자)나 보조자 없이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작품 창작 과정부터 기존의 작업과는 달라야 했고, 그 시작 또한 안무가의 영감이나 직감이 아닌 센서-햅틱 장비의 효과적인 연출을 고려해야 했다. 이에 안무가와 연구진은 기존의 안무 작업 과정을 해체하고 재결합하는 과정을 가졌다. 유선식 안무가는 동작을 만들면서, 무용수들 간의 움직임을 전달하고 전달받는 과정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관객에게 더욱 직관적인 단서를 주고자 가느다란 끈으로 무용수들을 연결했다. 그렇게 끈으로 연결된 무용수들은 서로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하며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이 프로젝트를 되돌아보니, 우리가 그동안 진행했던 작업은 무용에 대한 기존 고정관념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도에서 시작하였다. 아름다운 신체적 표현이나 안무적 구조에만 의존하는 방식에서 벗어났고, 무대 위 연출에서 기계와 기술적 장비의 활용은 중요했다. 또한, 관객에게 이렇게 장치를 몸에 부착해서 춤추는 모습 그 자체가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였을 것이다. 작품을 본 관객들은 대부분 감탄사와 함께 “참신했다” “신선했다” “흥미로웠다”고 말해주었지만, 일부 관객은 장비 착용으로 인한 동작의 제한성에 대한 우려와 장애인의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담론까지 논의의 대상으로 거론했다. 장애무용수의 독립적 창작 작업을 돕겠다는 긍정적 취지 아래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지만, 분명 누군가의 눈에는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거장 제롬 벨의 작품 〈장애극장〉 또한 부정적 비판에서 자유롭진 못한 듯하다. 그는 비평가들로부터 “현대판 괴물 전시와 같다” “장애무용수들의 존재를 단순한 구경거리로 축소시켰다” “장애를 낭만화했다”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주3) 우리 또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연구계획서에 작성될 단어 하나하나에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김희량 무용수가 우리에게 해준, “너무 큰 배려는 필요 없다”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마음을 다치게 하진 않을까, 우리의 태도가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난다. 시각과 청각의 제한으로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창작 작업을 할 때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차이점은 존재했다. 우린 그 부분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메워 다 함께 즐거운 예술 활동을 하는데 기여하고 싶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춤의 의미를 재고하고, 춤을 포함하고 있는 공연예술(Performing arts) 전반을 메타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지만, 우린 일단 그 시작의 선에서 함께하였고, 적어도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는 이번 기회로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벨트형 햅틱 장비는 시각장애 무용수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중에 개발되었다. 그들은 정확한 동작을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대 공간과 주위 무용수들 간의 간격을 맞추는 게 불편하고, 무대 위에서는 어디가 무대의 끝인지를 가늠할 수 없어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고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말했다. 연습 도중에는 누구든 그들의 자리를 수정해 줄 수 있지만, 진짜 무대 위에서 공연할 때는 스스로 자신의 위치와 상대방 무용수의 위치와 간격, 거리 등을 파악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것이다.
다름을 그대로 존중하면서 문제를 찾고, 그 해결책을 찾는 방안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내내 고민했다. 누구든 예술가가 될 수 있고, 창작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그리고 그때의 희열과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돕는 연구와 예술 작업 그리고 실험은 이제 시작되었다.
주2:농당스(non-danse)는 전통적인 무용 개념을 해체하고 춤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탐구하는 현대무용의 한 흐름이다. 특히 프랑스 안무가 제롬 벨(Jérôme Bel)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며, 춤의 형태를 벗어난 움직임을 통해 춤 자체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농당스는 무대에서 움직임, 정지된 자세, 또는 기존 무용 동작으로 정의 내려지지 않는 동작을 통해 기존 무용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판한다.
주3:Performing Failure: How Jérôme Bel’s Diasbled Theatre called the Hipster’s Bluff, (readingasawoman, 2015년 10월 22일) https://readingasawoman.wordpress.com/2015/09/22/performing-failure-how-jerome-bels-disabled-theatre-called-the-hipsters-bluff/ (2024년 9월 19일 최종 열람)
수를 세는 사람들
더블유투 프로젝트|2024.8.17.|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더블유투 프로젝트(W2 PROJECT)’는 KIADA(대한민국장애인국제무용제) 참가를 위해 구성된 프로젝트팀이다. 올해는 유선식 안무가를 중심으로 시각장애 무용수들이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는 2021년부터 연구된 ‘시청각 장애인의 문화예술 창작 및 협업 지원 기술 개발’의 일환으로, 연구를 통해 완성된 진동 햅틱 수트와 벨트를 활용하여 작품을 선보인다. 기술을 통해 시각장애 무용수들의 동작 전달과 안전한 공간 확보를 위한 연구자들의 고민과 노력을 볼 수 있다. 유선식 안무, 김희량·장해나·정반석 출연.
정지현
춤을 추고 춤에 대해 과학적으로 연구하면서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최근에는 센서, 햅틱, 카메라, AI 등을 사용하여 무용수들의 창작을 돕는 장비를 개발하는 데도 참여하고 있다. 현재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jh.joung@kaist.ac.kr
∙ 인스타그램 @jjihanaful
사진 제공.정지현, KIADA(사진 옥상훈)
2024년 10월 (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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