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리포트
영국 장애인 예술정책 및 사례
다양성과 창조성, 혁신의 자산으로
1946년 설립된 영국예술위원회는 ‘팔길이 원칙’을 근간으로 전 세계 예술정책을 견인하는 역할을 감당해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문화예술 진흥 추세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예술이 본격적인 예술정책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영국에서도 21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2012년 런던 올림픽 이후 장애인 예술은 사회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전례 없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글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장애인 예술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영국에서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현재의 기반이 갖추어졌는지, 또한 최근에 주목할 만한 흐름과 정책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이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무엇이 있는지를 간략히 고찰하고자 한다.
신사회운동과 의학적모델에서 사회적모델로의 전환
서구사회에서 장애인 운동이 사회적인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60년대 말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기존의 사회운동, 즉 부르주아의 해방적 운동이나 노동자들의 계급투쟁 운동과는 그 목표와 방법이 구별되는 ‘신사회운동’의 등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화운동, 여성운동, 생태운동, 지역자치운동, 흑인운동 등과 함께 새로운 권리와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깨우려는 신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장애인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기존의 지배적인 관점으로서 장애 및 장애를 가진 사람을 개인의 ‘결핍(deficits)’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장애인을 동정이나 보호, 치료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의학적 모델(medical model)’에 강력한 도전을 제기하였다. 그 결과, 장애를 개인의 결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관계’ 및 ‘불평등한 환경’의 결과물로 바라보는 ‘사회적 모델(social model)’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신사회운동에 뿌리를 둔 사회적 모델은 정책적, 입법적 차원의 변화와 보장을 집중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영국 사회에서 그 결실은 1995년 장애차별금지법(Disability Discrimination Act)의 제정으로 이어지는데, 이 법이 제정되면서 영국의 장애인 (예술) 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또한 2010년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여타의 차별금지법안과 통합되어 평등법(Equality Act)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서 장애는 여덟 가지 보호되는 속성(연령, 장애, 성전환, 혼인 및 동성결혼, 인종, 종교 또는 신념, 성별, 성적 지향)의 하나로 명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차별, 간접차별, 복합차별까지 규제가 명시되는 등 특별한 강조를 받게 된다.
사회적 모델과 창조적 모델, 공존이 가능한 두 개의 관점
1995년과 2010년 사이에 이루어진 장애인 차별에 관한 법‧제도의 정립과 더불어, 창조산업을 강조한 노동당 정부(1997-2010) 시기에 문화예술 및 문화산업의 본유적 가치 외에도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강조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흐름 속에서 ‘크리에이티브 파트너십(Creative Partnerships)’ 프로그램이 도입된 2006년부터는 ‘포용적 예술(inclusive arts)’ 개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경계를 넘어서고 사회적 변화를 꾀하기 위해 주변부와 비주변부에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에 예술적 촉진(facilitation)과 협업(collaboration)을 통해 창조적인 기회를 확산하겠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주된 목표였는데, 이러한 흐름은 기존의 정치 운동에 대한 몰두에서 벗어나 장애를 다양성과 창조성의 관점에서 혁신의 자산으로 바라보는 ‘창조적 모델(creative model)’이 도입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창조적 모델은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의학적 모델이나 장애를 사회 환경 및 권력의 문제로 보는 사회적 모델과 구분된다. 특히 각 모델의 실행 과제 차원에서 보자면, 장애를 정치적 아젠다로 사용하는 사회적 모델과 달리 창조적 모델은 장애인의 신체를 심미적 전략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두 모델은 양립이 가능한데, 장애를 심미적 자산이자 전략으로 활용하는 창작 활동의 경우 사회적 운동 아젠다와 결합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으로 날개를 단 창조적 모델
2012년 런던올림픽 개·폐막식에서 언리미티드(Unlimited) 프로그램을 통해 영국의 장애 예술이 전 세계에 커다란 울림을 준 것은 기존의 정체성 정치나 인권운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영국 장애 예술인들이 보여준 당당하고 다양한, 수준 높고 창조적인 미학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장애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 즉 창조적 모델의 힘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전례 없는 지원과 관심 속에서 장애 예술은 2012년 런던올림픽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이를 피부로 체감한 영국 정부와 영국 사회는 충만한 자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장애 예술에 대한 관심을 높여오고 있다.
일례로 잉글랜드 예술위원회는 2010년에서 2020년에 이르는 10개년 계획의 다섯 가지 목표 중 하나로 ‘다양성과 스킬(diversity and skills)’을 설정하고 집중적으로 장애 예술을 진흥하고 있다. 또한 영국문화부와 예술위원회는 ‘다양성을 위한 창조적 사례(Creative Case for Diversity)’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성 관련한 예술의 역사와 동향을 폭넓게 소개하고, 관련 연구와 비평을 담고 있는 포털 사이트를 운영했다. 연례포럼 개최, 예술위원회 및 예술위의 지원을 받는 기관들의 다양성 관련 연차보고서(Diversity Report) 발간, 문화예술계의 평등성과 다양성에 대한 정보(Diversity Data) 관리 등도 진행하고 있다. 런던 올림픽을 준비하며 시작된 언리미티드 프로그램은 어느덧 세 번째 시즌을 맞아 장애 예술인들의 ‘예술적 야심을 지원하고 실현하기’ 위한 전폭적인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장애인 예술정책을 위한 시사점
이처럼 영국의 장애인 예술정책 현황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영국문화부와 예술위원회가 자신들의 전략적 목표와 비전속에 ‘다양성과 평등성’을 중요한 의제로 끌어들이면서, 전방위적으로 장애인 예술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장애인 예술’이나 ‘장애인 권익’만을 강조한다면, 사회적인 관심과 참여를 끌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2010년 차별금지법의 제정으로 인해 일종의 ‘규모의 경제’ 효과가 일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법제화를 근거로 다양성 진흥이 문화정책의 핵심의제가 되었으며, 그중 가장 가시성이 높은 영역으로 장애인 예술이 이곳저곳에서 활약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이처럼 확실한 명분과 방향이 정책적인 변화를 위한 환경을 마련해주었으며, 영국의 장애 예술인과 단체들은 높은 수준의 작품 창작과 실연을 통해 그러한 방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우리의 장애인 예술 현장과 정책 역시 위와 같은 창조적 모델로의 전환을 위해 더욱 집중적인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다.
* 이 글은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2018,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내용 중 일부를 수정 및 보완한 것이다.
정종은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영국 글래스고대학교에서 문화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메타기획컨설팅에서 부소장으로,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부연구위원으로 재직한 바 있으며, 현재는 상지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문화경제학회, 한국문화콘텐츠기술학회의 이사를 맡고 있으며, 주요 관심영역은 4차 산업혁명, 문화 스타트업, 지역문화콘텐츠 관련 정책이다.
wooseulcho@gmail.com
[사진출처] 영국 예술위원회 홈페이지
[영상출처] YouTube 영국 예술위원회
2018년 11월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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