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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스토리리빙 시대와 장애 정체성 선명한 삶의 지문에서 찾은 공감과 공존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 등록일 2023-02-01
  • 조회수 941

트렌드리포트

최근 출판가에는 장애 당사자의 장애 정체성과 내러티브를 드러내는 책의 출간이 늘고 있다. 장애의 문제를 누군가가 대신 말해주는 형식이나 이른바 극복 서사나 언론이 시청률을 높이려고 만드는 ‘감동 포르노’가 아니라 장애 당사자가 자신의 언어로 장애를 이야기하는 책 출간이 늘어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변화다. 장애가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없이 우리는 이들의 솔직담백한 이야기에서 공존의 방법론을 터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애 당사자의 목소리로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김한솔, 김지우 그리고 정은혜의 책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자.

김한솔은 열여덟 살에 레베르 시신경병증 판정을 받고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의 달라진 시선이 당혹스러웠다. 시각은 잃었지만 아직 네 개의 감각이 남아있던 그는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깨달았고, 시각장애라는 큰 파도를 스스로 넘기 시작했다.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한빛맹학교에 입학해 전교 회장을 지냈고, 졸업 후 건국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해 장애인권 동아리 ‘가날지기’를 만들었다. 2019년에 ‘어떤 아픔도, 불편도, 우울한 현실도 모두 꿀꺽 삼키고 소화하겠다’는 뜻을 담아 유튜브 채널 ‘원샷한솔’(링크)을 개설하고 유쾌하고 진취적으로 살아가는 장애인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담담히 전하는 그의 얼굴에서 구김살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원샷한솔’은 네티즌 사이에서 회자되며 1년 2개월 만에 구독자 10만 명을 달성했고, 세계 최초로 모든 문구가 점자로 제작된 유튜브 실버 버튼을 받았다. 그는 2022년 9월에 펴낸 『슬픔은 원샷, 매일이 맑음』(위즈덤하우스)에서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장애는 매일매일 적응하며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만든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김지우는 일곱 살에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전교생 1,500명 중에 유일한 장애인이었고, 정규교육을 받는 내내 이런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사회에서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만 하는 그는 어디를 가든 모든 이의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휠체어와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고 화내면서 조금씩 단단해졌다.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하고서야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대학가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또한 “어리고 장애가 있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2017년부터 유튜브 채널 ‘굴러라 구르님’(링크)을 개설하고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에는 “비장애인 사회 속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디에도 나와 같은 몸을 가진 이는 없었”고 유튜브를 시작하고 나서야 “나와 같은 몸,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런 만남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인지를 처음 알았다”고 말한다. 휠체어와 굴러온 지 14년째 되는 해인 2022년에 첫 산문집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휴머니스트)를 펴냈다.

발달장애인인 정은혜는 화가이자 배우다. 우리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배우 한지민의 다운증후군 언니 ‘영희’ 역을 맡아 열연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갈 데가 없던 그는 2013년부터 초등학교 앞에 있는 엄마의 화실에 나가 맨 구석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2016년부터는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니얼굴’ 캐리커처 장사를 하면서 4,000여 명의 얼굴을 그렸다. 2022년 8월 출간한 『은혜씨의 포옹』(이야기장수)은 화가 정은혜의 첫 번째 그림에세이다. 이 책에는 그가 누군가와 포옹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실려 있다. 드라마에서 만났던 배우들을 비롯해 그가 만난 평범하지만 특별한 사람들과의 포옹이다. 사람을 안으면 자신이 따뜻해져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하는 그는 ‘포옹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만화가이자 동양화가인 어머니 장차현실은 “은혜씨가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는 행위는 사회적 신뢰를 획득해간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은혜씨는 ‘니얼굴 은혜씨’(링크)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 책의 독자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제 퍼스트 크리에이터인 작가가 세컨드 크리에이터라는 독자를 설득하지 못하면 책이 출간되더라도 바로 퇴출된다. 세컨드 크리에이터는 작가와 똑같은 욕망과 꿈을 가지고 스스로 크리에이터가 되고자 한다. 디지털 기술은 이들이 연결될 수 있는 통로와 터전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세 작가가 모두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이제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스토리텔링만으로는 독자를 설득하기 어렵다. 한때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스마트폰을 비롯한 디지털 디바이스의 보급으로 ‘체험형 콘텐츠’의 소비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일방적인 정보 제공이 아닌 쌍방향 소통을 지향한 스토리두잉의 중요성이 부각되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유니크한 이야기여야 통하는 스토리리빙의 시대다.

이 글에 등장한 개성 있는 세 작가는 바로 자기만의 삶의 지문을 보여주는 스토리리빙의 창조자들이기에 많은 독자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앞으로 자신의 삶을 핍진하게 그리는 책은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장애 당사자 문학의 확장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존하는 세상의 지평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더욱 반가운 일이다.

  • 슬픔은 원샷, 매일이 맑음 “우리는 분명 좋은 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 실명의 아픔을 딛고 빛을 찾기까지 김한솔의 삶을 바꾼 모든 순간들 위즈덤하우스

    『슬픔은 원샷, 매일이 맑음』
    (김한솔, 위즈덤하우스, 2022)

  •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어리고 장애가 있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아지면 좋겠다” 굴러라 구르님의 첫 에세이!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김지우, 휴머니스트, 2022)

  • 은혜씨의 포옹

    『은혜씨의 포옹』
    (정은혜, 이야기장수, 2022)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출판평론가. 격주간 출판전문지 [기획회의]를 1999년에 창간해 올해로 25년째 발간해오고 있다. 2010년 한국 최초의 민간 도서관잡지인 월간 [학교도서관저널]을 창간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책 읽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저자가 되어야 한다』 『하이콘텍스트시대의 책과 인간』 『책으로 만나는 21세기』 『새로 쓰는 출판 창업』 등 20여 권의 저서와 다수의 공저가 있다.
khhan21@hanmail.net

사진 제공. 위즈덤하우스, 휴머니스트, 이야기장수

2023년 2월 (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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