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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미친존재감 프로젝트 〈미친식당〉 춤추는 변수들

  • 김민조 연극평론가
  • 등록일 2023-12-27
  • 조회수 1377

리뷰

연극 바닥에는 ‘가픽스’라는 말이 있다. 가설무대라고 할 때처럼 임시성을 의미하는 ‘가(假)’와 어떤 사항을 확정함을 의미하는 ‘픽스(fix)’가 합성된 단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임시로 확정한다는 뜻이다. 한 편의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 단어만큼 적실히 설명해주는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연극은 구상, 제안, 수행, 반응, 논의 단계를 거쳐 유보 또는 확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의사결정의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어떤 아이디어가 운 좋게 확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완전히 매듭이 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극은 매일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면서 이제껏 그려놓은 설계와 배치를 엉망으로 어질러놓기 때문에, 어제까지 확정한 사안들이 내일 모조리 뒤집힌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오늘의 연습실에서 확정(fix)을 선언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일단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라는 글씨가 적힌 포스트잇을 마음 한구석에 부착해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연극은 공연이 개막한 이후에도 계속 바뀐다. 어쩌면 마지막 공연에서 관객들이 볼 수 있는 광경조차 ‘가픽스’의 총합일지 모른다. 연극을 대충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연극의 본성이기 때문에, 좋은 연극을 내놓은 팀일수록 그들의 공연에 대해 자신만만하게 굴지 못한다. 우리가 무대에 내놓은 ‘이것’이 완벽할 리 없으며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만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었음을, 미소와 손짓이 오가는 찰나의 순간 속에도 ‘저렇게’ 해볼 수 있었을 가능성이 무한히 주름져 있음을,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깝게 떼어버려야 했던 포스트잇, 사용되지 못한 더미 데이터,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 연습 과정에 잠시 옷자락을 드러냈던 무한한 잠재성의 우주를 목격했으면서도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경위들. 그런 모든 이유로 인해 연극은 막을 내리고도 여전히 가픽스 상태를 경과한다.

공연이 아니라 연습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삶에 허락되지 않는 그런 ‘아사모사함’(주1)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이해하는 한 ‘미친존재감’이라는 프로젝트의 구성원들이 매번 함께 만들어온 연극의 모양, 혹은 사랑의 모양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모름지기 연극은 어때야 한다거나 우리가 함께 있으려면 무엇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를 앞세우는 대신, 모든 규칙과 목표를 가픽스에 부치는 공동체. 2022년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이하 〈미친집〉)에 참여했을 때 내가 경험한 공동체는 아프면 중단하고, 늦으면 기다리고, 궁금하면 물어보면서 그날 무엇을 어디까지 연습해야 할지를 계속 바꿔나가는 공동체였다. 각각의 구성원들이 느끼는 욕구와 저항감에 따라 매번 목표를 다시 정해가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고,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를 유일한 전제로 삼는 〈미친집〉이라는 공간에 머무는 동안 다른 곳에서 느껴보지 못한 큰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연극을 연극처럼 만들기 위해 억제해 왔던 잠정성과 비결정성, 그리고 상호의존성이라는 연극의 본질을 거기에서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2023년, 미친존재감은 정신장애인의 ‘집’을 주제로 했던 〈미친집〉에 이어 ‘노동’을 주제로 한 〈미친회사〉라는 공연을 기획했다. 우여곡절 끝에 오리엔테이션 진행자로 참여하게 된 나는 백과사전에서 노동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사전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노동은 대체로 ‘인간이 생존이나 생활을 위해 수행하고 대가를 받는 활동’으로 정의되고 있었다. 내게 이 정의는 포괄적이기보다는 배제적인 정의에 가깝게 느껴졌다. 동식물과 기계의 노동을, 생존이나 생활과 무관한 수행을,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활동을 노동의 범위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 문장은 내가 〈미친집〉에 함께하는 동안 감지했던 무수한 질적 노동들 또한 온전히 가리키지 못했다. 그래서 〈미친회사〉를 위한 오리엔테이션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행위’라는 통념적인 틀에 부합하지 않는 미시적인 노동의 경험을 최대한 많이 경청하고 수집하기 위한 과정으로 기획되었다. 자신의 노동 이력을 발표하는 ‘나의 노동 연대기’라는 프로그램에서 왈왈, 지우, 호연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곳에서 끊임없이 일해왔는지를, 혹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는지를 들려주었다. 정신장애인은 직무에 부적합하다는 선입견을 피하고자 자신의 장애를 숨겨야 하고, 취업하더라도 쉽게 해고된다. 정신장애인의 노동은 정당한 노동으로 대우받는 대신 ‘보호’, ‘복지’, 내지는 ‘일을 시켜주는 것’이라는 시혜적인 태도 속에서 쉽게 착취되곤 한다. 사회는 정신장애인에게 노동할 권리를 박탈하고, 노동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주2) ‘일을 하고 돈을 버는 행위’라는 노동의 정의는 이 비틀린 구조를 조금도 반영하지 못하면서도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자긍심에 지속적으로 상처를 낸다.

통념적인 노동(자)의 정의는 사회적으로 대가가 책정되지 않은 노동들, 예컨대 돌봄 노동이나 연대 활동을 배제하거나 가치 절하하는 강력한 틀이기도 하다. 정신장애인이 일상적으로 끊임없이 수행하는 의존과 돌봄의 과정은 이 틀 안에서 가시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케어링 맵’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각자가 조금이라도 신경 쓰고 있는 일을 스케치북에 적어서 공유하고, 이 모든 것을 노동이라고 부르자는 합의에 도달했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는 편찮으신 아빠에 대한 걱정이, 오늘 연습이 잘 될까 하는 노파심이,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는지 신경쓰는 일이, 심지어는 다른 구성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모두 노동이 될 수 있었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외부 조력자의 위치로 돌아가면서 나는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행위를 포괄하기 위해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쓰는 어떤 회사를,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해왔으며 하고자 하는 일을 의심 없이 노동으로 명명하는 그런 회사의 모습을 이 사람들이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그런데 올해 11월에 동업자의 자격으로 찾은 〈미친식당〉의 모습은 내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그 회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친’ 회사였다. 나는 노동에 대한 통상적인 관념을 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목표와 기능을 위해 조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회사’라는 공간에 대한 이미지까지 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미친식당〉은 내가 〈미친집〉에서 경험했으나 잠시 잊고 있었던 ‘가픽스’의 정신(?)을 더욱 급진적으로 계승한 공간이었다. 동업자들은 안전조끼를 골라 입고 미친 회사의 직원들과 함께 피자를 굽거나,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거나, 토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이 공간에서 그런 ‘노동’을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동업자는 빈백에 누워 레고를 맞추며 놀아도 되고, 사방에 붙어 있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발언을 읽어보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새로 붙여도 되고, 부서를 옮겨서 참여하거나 딴짓을 해도 되고, 이 장소에 머물러 있는 것이 힘들면 나갔다 오거나 탈주해도 된다는 것이 이 미친 회사의 룰이었다. 〈미친식당〉의 창작진은 노동하지 않을 자유를 지지하는 노동의 공간이라는,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을 회사를 기어이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신선하다 못해 불온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이것이 사회가, 그리고 연극이 가장 두려워하며 억제하고자 하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회사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각자를 허락하게 될 것이므로. 노동자를 노동생산성과 동의어로 보는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결근한 사람에게 박수를 쳐주고, 쓰러지면 부축해 주고, 메뉴 가격을 정하다가 수학 문제를 풀고, 비건 피자와 보더리스 화장실을 디폴트로 삼는 회사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출연진과 관객이 무엇을 보거나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없이 모여 있어도 ‘땐땐하지 않은’(주3) 그런 공간을 어떤 연극이 만들어낼 수 있을까.

〈미친식당〉은 ‘가오픈’이라는 단어에 무척 어울리는 공연이다. ‘노동-하기’를 전유하는 노동자들로서, ‘회사-되기’에 저항하는 회사로서, 미친식당은 공연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가오픈 상태로 열려 있을 것이다. 기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공간이란 그저 텅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노동하는 고통과 노동하지 못하는 고통의 양면을 거쳐온 이들이 예리하게 발달시켜 온 기다림과 감응, 보살핌의 감각으로 가득 찬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춤추는 변수들을 기꺼이 긍정하고, 중단과 번복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픽스의 공동체. 그런 식당의 불빛이 언제나 모두의 마음 한편에서 밝게 빛나고 있기를 바란다.

주1.‘아사모사하다’ 또한 연극 바닥에서 널리 쓰이는 은어다. 이 단어의 뜻을 알아듣는 사람은 연극쟁이일 확률이 높다. 아사모사하다란 정확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태를 가리킨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과 저것의 뉘앙스를 혼합한 중간적인 상태를 지시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복합적인 감정 연기나 장면 연출이 요구될 때 이 단어가 곧잘 쓰이곤 한다.

주2.노들장애학연구소의 고병권 연구원은 정신장애인에게는 그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요구할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지적하며, “미친 사람에게는 말의 권리가 없다”라고 썼다. 같은 맥락에서 “미친 사람에게는 노동의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병권, ‘미친식당 노동후기’, 《경향신문》 2023.11.16.

주3.‘땐땐하다’ 또한 연극 바닥에서 널리 쓰이는 은어다. 이 단어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연극쟁이가 분명하다. 땐땐하다란 어색하고 위화감이 드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 커다란 주방 겸 거실에서 사람들이 함께 얘기하거나, 요리하거나, 소파에 엎드려 있다.
  •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고 있다.
 
2023 미친식당 가오픈 동업자를 모집한다.

미친식당

미친존재감 프로젝트|2023.11.9. ~ 11.12.|미친식당

공연이 아닌 동업자와 함께 노동하기를 콘셉트로 동업자를 모집한다. 함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에 6명씩 4시간 동안 이들과 요리 만들기, 메뉴판 만들기, 질문 만들기, 함께 있기 기타 등등을 진행한다. 동업자에게는 두꺼운 공유기록집 노트, 예쁜 조끼, 저녁과 간식, 함께 고민할 것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문화소식] 공연정보

김민조

프리랜서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내게 연극은 너머를 가르치는 학교다. 〈다른 부영〉 〈러브 앤 인포메이션〉 〈경계를 위한 시뮬레이션〉 등의 공연에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하기도 했다. 원고의뢰는 환영하고 공연초대권은 사절합니다.
wingmn1k@gmail.com

사진 제공.미친존재감 프로젝트

2024년 1월 (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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