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고등학교 때 도예를 접한 후 아주 자연스럽게 도예가의 길을 걷게 된 임병한 작가에게서 언뜻언뜻 나오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은 쉽지 않은 작업 과정의 그 힘듦을 이겨내고 예술의 즐거움과 성취감을 누리는 것 같았다. 충주 해너울공방에서 임병한 도예가를 만나 그의 도자 작업의 매력과 예술 경험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하고자 한다.
점토 작업을 언제 처음 접했고 무엇이 흥미로웠나?
고등학생 때 처음 접했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던 데서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그게 불에 구워지면서 완전한 작품으로 하나가 나오는 과정에서 그냥 굉장한 만족감을 느꼈다. 얼마 전에 (제가 다녔던) 서울삼성학교 개교 40주년 행사에서 작품 전시를 하고 왔다. 지금까지도 청각장애 아이들을 위해서 도예 수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사실 학교 다닐 때는 장난꾸러기였는데, 선생님들이 이렇게 도예가의 길을 가는 내게 ‘잘 되었다’라고 하면서 엄청나게 뿌듯해하시더라.
점토로 무언가를 처음 만든 때의 기억이 궁금하다. 재료로서 도자 흙이 주는 가장 큰 물성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부드러움. 아기가 엄마의 가슴을 만질 때 아마 그런 부드러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마음을 굉장히 편안하게 했다. 그래서 미술 심리치료 쪽에서도 점토를 활용한 치료를 한다고 하더라. 재료가 부드럽고 편안해서 거부감이 없다.
본격적으로 도예가로서의 길을 걷고자 한 이유가 있을까?
운명인 것 같다. 지금까지 그냥 이렇게 쭉 연결된 거다. 고등학생 때 특별활동으로 취미처럼 시작했지만, 선생님들이 여러 대회에 참가하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도예가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기능대회와 창작대회에서 수상도 꽤 했다. 졸업하면서 서병호 선생의 음성 도산도방에서 한 4년 정도 일했는데, 그분이 대학 진학을 권해서 강원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미도요 구성회 선생 밑에서 4~5년 동안 사발 같은 전통 도예를 배웠다. 그 후엔 불 때는 게 재밌어서 김대웅 선생 밑에서 통가마 무유소성 기법을 4~5년 정도 배웠다. 그러다 보니 단계별로 다 거친 것 같다. 생활자기, 전통자기, 그리고 전통 가마 불 때기까지 습득했더라.
도자기를 만드는 작가로서 가장 큰 즐거움은 무엇이고, 어떤 경험을 나누고 싶은지 궁금하다.
흙으로 호랑이를 만들면서 나 자신과 대화하기도 한다. 스스로 무언가에 푹 빠져 있는 그런 모습들, 그런 것들 때문에 도자기 작업이 좋다. 그리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한다. 사실 전시회를 하거나 아트페어 같은 데 출품하면 하루도 안 빠지고 나간다. 전시장에서의 진행과 판매 등은 아내인 권지영 작가가 하게 되니까 직접 가지 않아도 되는데, 사람을 좋아해서 항상 같이 있다. 내 작품을 좋아해 주는 걸 보면 뿌듯하기도 하고. 결국 완성작을 가지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그런 현장에서 오는 감각, 감정을 즐기는 것 같다.
작업은 거의 혼자 하기 때문에 전시회나 아트페어 때 말고는 사람 만날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일반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가마에 불 땔 때 맞춰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한다. 오신 분들한테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무유소성에서 특별히 사용되는 트임 기법 같은 것을 직접 가르쳐주면서 소통하는 걸 좋아한다. 아내가 그런 자리를 일부러 기획해서 만들기도 하는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교류하고 관계 맺기를 하면서 성취감 같은 것을 같이 나눈다. 사람들이 이렇게 도자기로 호랑이를 만들면서 미적인 만족감이나 동감, 이런 것들을 느낄 때 그게 작가의 역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만든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하는 작품이 있나? 어떤 이유로 끌리는가?
〈안개 낀 달항아리〉라는 작품이다. 통가마 무유소성이라는 게 아무리 형태를 잘 잡고 기술이 좋다고 해도 가마에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또 달라진다. 자연이 만들어주는 불이 늘 새로운 작품을 탄생하게 하는 거다. 자연과 함께 만들어내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작가 뒤편 선반에 놓인 항아리를 한아름에 집어 안으면서) 이 〈안개 낀 달항아리〉는 어느 쪽에서 보면 정말 딱 안개가 껴 있는 달의 모습이고, 또 이렇게 돌아가면서 보면 온전한 보름달이 있기도 하고. 아무튼 보이는 부분마다 이렇게 다 달라진다. 그래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달항아리 형태도 좋아하지만 소성을 하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자연과 함께 한 게 더욱 마음에 드는 것 같다.
혹시 호랑이 ‘덕후’인지 여쭤보고 싶다. 익살스러운 호랑이 모습 혹은 도자 표면에서 호피 무늬를 활용하는 등 작품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매력은 무엇일까?
‘나답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있다. 내가 표현하는 호랑이들은 진짜 개구쟁이 호랑이들이다.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호랑이,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호랑이, 오줌 싸는 호랑이, 비 올 때 나가기도 하고 산책도 하는 호랑이. 전부 내가 하는 것들이다. 호랑이를 만들지만, 결국 나 자신이 표현되는 것 같다. 원래는 다른 동물들도 만들었는데, 잠실창작스튜디오(현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에서 작업하면서 작가로서의 스토리텔링을 심화해서 호랑이에 좀 더 집중하고 파고든 지 7년 정도 되었다. 첫 번째 호랑이는 전래동화 ‘해님 달님’ 호랑이였고, 그러다가 민화 속 호랑이로 변화했다. 그리고 호랑이해에 전시를 많이 보고 다녔는데,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의 《호랑이전》에서 영감을 받아서 범피 무늬도 작업에 응용하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만든 작품으로 2023년 사발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됐다. ‘만약 호랑이가 달에 갔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 상상에서 나온 호랑이는 달에 도착한 호랑이로도 작품에서 등장했다.
그동안의 전시회 제목을 보면 ‘전하다, 말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한자 ‘전(傳)’의 고어인 ‘뎐’을 사용해 《부부뎐》 《호랭뎐》으로 하셨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조금 의도가 있었다. 전체적인 전시회 이미지와 전시 작품 이미지에 다 맞으니까. 기획은 아내도 도와주어 같이 정했던 건데, 내가 하는 작업이 이렇게 동화에서 또 오래된 민화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다시 풀어내는 거잖나.
작가님의 노력이 다한 지점에서 자연이 드디어 역할을 하는 시간, 그것이 무유소성을 고집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 같다. 유약을 바르지 않고 소성하는 통가마 무유소성의 매력에 대해 좀 더 듣고 싶다.
무유소성 기법은 통가마에서 장작을 이용하여 60시간 이상 불을 때 재가 기물 표면에 붙어 유리질이 형성되어 자연 유약을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 시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래서 훨씬, 훨씬 자연스럽다. 명지대학교에서는 유약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재료학적인 측면인데, 화장토 성분을 직접 만들었고 그림은 철을 사용했다. 재료가 가진 본연의 성질을 이용하여 작업하는 것을 즐긴다. 통가마무유소성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거기서는 이 기법의 역사를 신라 토기나 가야 토기로부터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사실 한국은 명맥이 끊겼다가 다시 찾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1990년대에 유럽에서 공부하고 와서 시작한 양승호 선생이 1세대이고 김대웅 선생이 그 뒤를 이었는데, 저는 김대웅 선생께 5년 정도 이 기법들을 배웠다.
도예작가로서 작업 중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다. 장시간의 가마소성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도 있나? 이를테면 가마에서 연기가 하루 이틀 넘게 계속 뿜어져 나와 주민이 화재로 오인해 신고했다든지….
주택가 같으면 신고가 들어가겠지만, 여기가 도자기 마을이고 시골이라 그런지 3일 동안 불을 때도 신고 들어간 적은 없었다. 에피소드라면 불을 땔 때 비가 엄청 많이 와서 도저히 불을 더 지필 수가 없어서 그대로 불구멍을 닫아 멈췄다가 며칠 뒤에 다시 불을 땠는데, 그때 도자기들이 제일 잘 나왔었던 것 같다. 언젠가 한 번은, 좋은 작품이 나와야 할 것 같아 끝까지 잠 안 자고 계속 가마소성을 하겠다고 큰소리쳤었다. 그런데 아내가 점심 식사를 준비해서 와 보니 잠깐 사이에 기절한 듯 쓰러진 채로 잠이 들어 있더란다. 결국 아내가 나 대신 2시간 정도 장작을 때줬다.
작업 중에 생긴 실수가 오히려 새로운 작업을 위해 좋은 경험이 되었던 적도 있을까?
작업 중에 생긴 실수를 통해 흙 레시피가 새롭게 만들어지곤 한다. 흙 레시피가 엉켜서 오히려 더 좋은 느낌이 날 때도 있다.
작업이 사실은 노작을 넘어서 노동까지 가잖나. 혹시 작업하기 위해 특별히 하는 활동이 있나?
우리는 12월부터 2월까지 겨울이 비수기다. 그래서 겨울에는 쉬면서 재충전할 겸 아내와 둘이 배낭 지고 해외여행을 가기도 한다. 시각에 민감해서 보는 대로 뭔가 내 작품에 표현된다. 얼굴 없는 호랑이도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사원에 갔다가 영감을 받았다.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도 뭔가 고즈넉하고 조용해 가장 기억에 남은 여행지로 추억한다. 보로부두르 사원, 앙코르와트 사원 모두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공간들이었다.
작품이 꽤 긴 시간에 걸쳐 만들어지는데, 혹시 일상에서 쉽게 사용하고 버리는 대량 생산된 일회용품들을 사용하게 될 때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제가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데, 일회용 컵에 마시면 차 맛이 달라져서 내 잔을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환경적인 이유보다는 맛의 취향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약간 농담 삼아 얘기하기도 한다. 죄송합니다. (웃음) 인도에서는 짜이나 요거트를 일회용 토기에 담아준다. 그곳의 흙으로 만들기 때문에 야외에서 장작불로 때는 것이 플라스틱 일회용품을 생산하는 것보다 저렴하다. 그리고 음식을 먹고 나면 위생을 위해 깨뜨려서 자연으로 돌려 보낸다. 일회용품처럼.
기본적으로, 필연적으로 작업에서 흙, 물, 불을 사용하는데, 작가님이 자연과 환경을 대하는 마음가짐, 태도는 어떤 입장일까?
자연에 굉장히 민감한 작업을 하고 있으니 더욱 신중하게 잘 만들려고 노력한다. 잘못된 도자기를 깨지 않고 다시 적극적으로 재활용하고 되살리기 위해 옻칠 같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 만들어내는 것 중 항상 몇 퍼센트는 잘 안 나오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용도의 조형품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보완해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끔 해보는 거다. 그것도 일종의 환경에 대한 고민이다. 환경에 대한 안타까움, 미래 세대를 위한 배려를 고민하고 있다.
임병한
강원대학교에서 도예학을 공부하고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세라믹아트공학(도자기기술학과 유약 전공)을 공부했다. 부인 권지영 작가와 함께 충주 해너울공방을 운영하며 ‘그향’이라는 도자 브랜드를 운영한다.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전 잠실창작스튜디오) 9기(2017)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개인전 《호랭뎐》(2022, 인사동 갤러리 밈) 《범이온다》(2023, 이천 도자예술마을 갤러리 더닷), 첫 번째 커플전 《부부뎐》(2021,한국미술관) 등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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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원
미술작가, 《어제 본 달》(2023, 어계원 갤러리), 《일회용 하루》(2019, 청주시립미술관), 《긴 섬, 드문 바람 오롯한 그림자》(2021, GS칼텍스 예울마루 장도전시관) 등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하였다. ‘작업실 짜장’과 ‘스페이스로’를 통해 예술교육활동과 기획자로서의 활동도 고민하고 실험하고 있다.
jwononline@gmail.com
사진.이재범 POV스튜디오 실장 andy45a@naver.com
인터뷰 도움.권지영 작가
자료사진 제공.임병한
2024년 1월 (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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