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리포트
‘접근성 매니저’라는 명칭을 가지고 일하는 것은 뭐랄까, 불확실한 것투성이다. 최근 3년간 여러 연극공연과 축제에서 접근성 매니저로 작업을 했지만, 단 한 번도 업무의 범위와 내용이 같았던 적이 없다. 원체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대체로 즐겁지만, 때때로 전문성에 대한 고민이 생기기도 한다. 장애인 관객이 무사히 예술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업으로 가진 사람으로서 나의 목표는 결국 더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것이다. 작년 10월 참여했던 웹진[이음] 좌담에서, 접근성 매니저로 작업하며 겪었던 가장 큰 갈등을 ‘장애인 관객이 없는 것’이라고 답했던 것이 생각난다. 당시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100퍼센트 진심이었다. 이는 장애인 관객을 만나고 싶은 창작자라면 모두가 겪고 있는 어려움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장애인의 예술 향유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며 더 나은 방향을 찾는 데 도움을 줄 만한 해외 사례를 필자의 경험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장애인의 기준에서 모두 함께 접근성을 개선한다: 애티튜드 이즈 에브리씽
애티튜드 이즈 에브리씽(Attitude is Everything, 이하 AiE)은 2000년에 설립된 영국의 비영리 자선단체로, 음악을 사랑하는 장애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음악, 라이브 이벤트 산업의 접근성을 개선함으로써 장애인을 청중, 공연자, 전문가, 자원봉사자 등 다양한 주체로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고자 한다. AiE는 ‘미스터리 쇼핑’ 프로젝트를 통한 음악 공연 및 페스티벌 모니터링, 모범 공연장 선정과 승인제도, 접근성 교육 등을 운영하며 장애인의 공연 관람 활성화를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또한 매년 현황 보고서(State of Access Report)를 발표한다.
미스터리 쇼핑에서는 장애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미스터리 쇼핑’(Mystery Shopping)은 AiE의 심장이 되는 핵심 정체성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장애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원봉사 체제로 운영된다. 미스터리 쇼퍼 팀은 영국의 음악 공연이 이루어지는 공연장, 클럽과 페스티벌에 직접 찾아가 현장의 접근성 및 전반적인 경험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보고한다. 이 기록을 통해 AiE는 음악 공연 현장의 장벽(배리어)을 식별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책을 제시한다. 미스터리 쇼퍼 팀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홈페이지에 있는 가입 신청서를 작성하면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장애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영국 평등법(Equality Act 2010)에서 말하는 장애의 정의에 부합하기만 하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고, 그 판단은 당사자의 몫이다. 국내 공연계에서 일하다 보면 장애인 관객이 본인의 장애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창작자나 주최자의 입장에서는 국가에서 발급한 복지 카드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겠지만, 많은 관객을 만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조금은 다른 시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장애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면 더 많은 장애인 관객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예술을 만나러 올 수 있지 않을까.
네트워크로 만들어 낸 견고함과 안전함 AiE의 자료들을 살펴보며 가장 부러웠던 점은 그들이 가진 단단하고도 넓은 네트워크와 인프라였다.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1,000명 이상의 장애인이 미스터리 쇼퍼와 축제 자원봉사자로 활동했음
② 10,000명 이상의 업계 종사자에게 장애 평등과 고객서비스 훈련 및 교육을 진행함
③ AiE 및 풀뿌리 공연장 승인제도를 통해 200개 이상의 축제 및 공간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함
④ 영국 전역에 걸쳐 175명 이상의 장애인 예술가 네트워크를 형성함
이러한 네트워크와 인프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견고함과 안전함이다. 견고함과 안전함은 장애인 관객과 창작진 모두에게 필요하다. AiE의 인프라 안에서 관객은 더 편안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고, 전문성을 인정받은 창작자들은 더 원활하게 관객과 만날 수 있다. 아직 국내에서는 관객과 창작진이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견고한 네트워크를 찾기 어렵다. 접근성 작업의 범위나 개념도 확립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접근성 작업이 공공의 자원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는 현재 상황에서, 흩어진 작업을 모아 단단한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는 것이 꼭 필요해 보인다.
접근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20%의 소비력을 놓친다 지난해 ‘배리어프리 서비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가 함께 작업하던 수어 통역사로부터 수정해 달라고 요청받은 경험이 있다. 실제 뜻과는 별개로 ‘서비스’라는 단어에 내포된 시혜적인 태도를 주의하자는 이유에서였다. AiE는 장애인을 한 명의 소비 주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영국 평등법에 따르면 국민 5명 중 1명은 장애인이다. 실제로 2019년에 AiE의 승인을 받은 공연장 및 행사에서 930만 파운드(한화 약 150억 원)가 장애인 및 장애인 가족, 주변인에 의해 소비됐다. 대한민국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등록 장애인 수는 265만 2,860명이다. 이들은 단순히 수혜의 대상이나 복지의 대상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수치화되고 가시화된다면 더욱 많은 예술가가 접근성 작업을 시도하는 좋은 근거가 될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AiE가 2017년 11개 언어로 발행한 「DIY 접근성 가이드(DIY Access Guide)」도 짚어보고 싶다. 이 접근성 가이드에는 음악 공연에서 큰 비용 없이 비교적 가볍게 시도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가사에 자신만의 DIY 캡션을 만드는 방법, 온라인 이벤트 페이지에 포함할 정보, 접근 가능한 전단지를 만드는 방법, 공연이 접근할 수 없는 장소에 있는 경우 할 수 있는 일 등이 그것인데, 개인적으로는 가이드의 내용 자체보다도 유쾌함과 멋을 잃지 않으려는 디자인과 글의 구성이 인상 깊었다. 다른 공익적인 영역도 대체로 그렇지만, 접근성 작업을 하며 늘 아쉬운 부분은 너무나 진지하고 무겁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창작자가 아주 적은 비용과 시간으로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 유쾌함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진지하고 무거운 것은 쉽게 정체된다. 유쾌함을 지키는 것은 관객들을 더욱 편안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창작자에게도 지속 가능한 영감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누군가를 위한 일이 모두를 위한 일이다: 언리미티드 페스티벌 ‘접근 가능한 마케팅 가이드’
「접근 가능한 마케팅 가이드(Accessible-Marketing-Guide, 이하 마케팅 가이드)」는 2016년 영국의 국제 장애예술가 커미셔닝 프로그램이자 장애예술 축제인 언리미티드(Unlimited) 수석 프로듀서와 아츠어드민(Artsadmin) 마케팅 담당자가 첫 출간했고, 2020년에 아츠어드민과 쉐이프아츠(Shape Arts)에서 업데이트했다. 이 자료에는 마케팅 접근성의 필요성과 더불어 웹사이트, 인쇄, 텍스트, 형식, SNS 등 전반적인 접근성에 관한 가이드라인과 참고할 만한 리소스가 12페이지에 걸쳐 적혀있다.
서론에서는 접근 가능한 마케팅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그 대상이 비단 장애인과 노인뿐만 아니라 훨씬 포괄적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밝은 햇빛 아래서 고대비 화면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시끄러운 기차 안에서 자막은 모든 영상 시청자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배리어프리 공연을 제작하다 보면 제한된 조건 안에서 대상을 특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배리어를 인식하는 과정과도 연결되기에 꼭 필요한 작업이다. 다만 대상을 특정하는 것만큼이나 포괄적인 범위의 접근성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두 과정은 반대 선상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위한 접근성은 모두를 위한 접근성을 위한 기반이 된다.
본문에서는 사소한 부분을 꼼꼼하게 다루고 있다. 글은 간결하고 짧게 써야 한다든지, 글자는 12포인트 이상으로 해야 하며, 키보드만으로 웹사이트를 탐색할 수 있어야 한다든지, 점자보다 음성을 사용하는 인구가 많은데 각각의 언어를 사용할 때 어떤 것을 주의해야 하는지, 사용 가능한 SNS의 종류와 기능은 무엇인지 등을 담고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보니 놓치는 부분들이 꼭 생기는데, 작업 전후로 디테일을 짚어보면 큰 도움이 될 듯하다.
한 가지 짚고 싶은 점은, 마케팅 가이드에서 제시한 미션을 완수하는 데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케팅 가이드는 그 형식의 특성상 입문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보다는 정답에 가까운 상세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현장의 고민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총체적인 경우가 많다. 또한 그 깊이도 시간과 함께 흐른다. 마케팅 가이드를 통해 정답에 가까워지되, 정답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 새로운 문제에 대한 고민과 논의, 실험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조금씩이지만 분명 나아가고 있다
해외 사례를 소개하다 보니 국내 사례의 아쉬운 부분들만 언급하게 된 것 같아 괜히 마음에 걸린다. 사실 국내에서도 많은 창작자가 멋진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실시간 문자통역을 사용하는 음악 공연 사례도 늘고 있고, 연극배우들의 유쾌한 연기로 꾸려진 음성 포스터가 제작되고, 기존의 보편화된 접근성을 뛰어넘는 색다른 예술적 시도들이 발견되고, 자폐 스펙트럼과 지적장애인 관객을 고려한 릴랙스드 퍼포먼스 공연이 진행된다. 다양한 경험과 시각으로 제작된 가이드도 만들어져 공유되고 있으며,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과 이음온라인 웹진[이음]의 노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여전히 장애인 관객들의 ‘예술을 만나러 가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난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시도를 이어 나가는 이들 덕분에 조금씩이지만 분명히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동료들에게서 많이 자극받고 배우고 있다. 다소 편협할 수 있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번 글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누군가에게 작은 인사이트를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창작자들의 ‘관객을 만나러 가는 길’ 위에서 생겨난 고민을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
[참고 링크]
이충현
장르와 주제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문화기획자. 최근 본격적인 접근성 작업을 위해 동료들과 함께 ‘조금다른 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연극 <액트리스 원: 국민로봇배우 1호> <액트리스 투: 악역전문로봇> <허생처전>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구십 구명의 꼬마들과 나눈 대화>와 축제 <2022 노리미츠인서울> 등에 접근성 매니저로 참여했다.
june4146@naver.com
▸ 페이스북
▸ 인스타그램
자료 제공.필자
2023년 7월 (43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제공하는 자료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 4유형 : 출처표시,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의 조건에 따라 이용이 가능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