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리포트
장애의 시선② 영화 <채비>
독립과 자활 사이, 희생과 연민을 넘어
<채비>(2017)는 고두심, 김성균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조영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영화는 30대 지적장애인 아들을 돌보는 70대 노모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어떤 채비를 해나가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장애, 모성, 죽음, 이별 등 신파의 소재를 다루지만, 예상과 달리 씩씩하고 담담하다. 영화는 신파가 아닌 장애인의 자립에 방점을 찍으며, 희생적인 모성이 아닌 보편적인 연대로 나아간다. 영화의 만듦새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관습적이고 매너리즘에 빠진 김성균의 연기와, 비장애인 누나와의 관계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밋밋하게 소진해 버린 것은 못내 아쉽다. 하지만 그런 단점을 상쇄할만한 장점을 지닌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절제의 미덕과 성찰적인 시선, 그리고 장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상찬할만하다.
1. 장애아들을 둔 노모
조영준 감독은 2013년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 소개된 50대 지적장애인 아들과 함께 사는 80대 노모를 보고 영화를 기획했다고 말한다. “아들과 한날한시에 죽고 싶다”는 노모를 보고, 감독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아들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다고 한다. 장애 아들을 돌보는 희생적인 모성에 주목했다면, 이후의 삶을 희망적으로 그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보편적인 부모-자식 관계를 발견하였다. 장애를 특수한 것으로 바라보지 않는 순간, 피학적 슬픔이 아닌 담담한 배움의 시간이 열린다.
애순(고두심)은 지적장애가 있는 아들 인규(김성균)에게 밥을 차려 먹이고, 자신이 일하는 공원의 작은 매점에 데리고 가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애순에게는 결혼한 딸(유선)과 손녀도 있지만,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 탓에 오히려 애순에게 아쉬운 손을 내미는 형편이다. 30년을 하루 같이 인규를 돌보며 살아오던 애순에게 어느 날 뇌종양이라는 진단이 내려진다.
병에 대한 걱정보다, 인규를 혼자 둘 생각에 애순은 막막해진다. 인규를 맡길 시설을 알아보지만 괜찮은 곳에는 자리가 없다. 입소가 가능한 시설이 있지만, 그곳의 장애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안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다. 수용시설에 가까워 보이는 그곳 관계자에게 “인규는 밖으로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외출을 시켜줄 수 있는지” 묻자, 보호자가 자주 와서 외출을 시켜주라는 답이 돌아온다. 애순은 그곳에 갇혀 하루하루를 보내다 노인이 되어버린 인규의 얼굴을 환영처럼 보고 화들짝 놀란다.
2. 장애인의 자립 생활
애순은 인규에게 자립 생활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밥하는 법, 가장 좋아하는 계란 프라이를 만드는 법 등을 가르친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혼자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살림 능력을 익혀야 한다. 혼자서 밥을 차려 먹고, 누가 깨우지 않아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씻고 일과를 시작하고, 주변을 정돈하는 능력이 없어서 건강과 사회생활을 망치는 독거인들이 의외로 많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익혀야 할 과정이지만, 지적장애인에게 이를 가르치는 것은 훨씬 더디고 큰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애순에게 가장 먼저 장애인 자립생활에 대해 알려주었던 구청 공무원 박계장은 “장애인의 자활훈련에는 전문적인 지식과 오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애순은 박계장이 건넨 자활훈련에 대한 책을 펴고 수십 년 만에 공부를 해가며, 6개월 만에 인규에게 기본적인 신변처리 능력을 마스터시킨다.
그런데 살림 능력이 전부는 아니다. 인규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사회생활 능력이다. 애순은 인규에게 직업훈련을 시킨다. 장애인들의 자활을 돕는 제과점에는 인규처럼 경증의 지적장애를 지닌 동료들이 여러 명 있다. 애순은 처음 직업 자활을 소개받았을 때, 인규보다 심하지 않은 장애인만 가능한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애처로운 마음에 인규를 품에 끼고 사느라, 인규의 장애 정도와 능력을 정확히 몰랐던 것이다. 인규는 학교에서 제과제빵을 배운 적이 있다. 그러나 직업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훈련이 필요하다. 애순은 인규에게 사람들과 다투지 않는 법과 친절하고 상냥하게 인사하는 법을 집중 훈련한다.
3. 이별과 죽음을 가르치는 엄마
영화에서 가장 숭고함이 느껴지는 장면은 애순이 인규에게 이별과 죽음을 가르칠 때이다. 애순은 인규가 연정을 품은 유치원 교사(신세경)에게 인규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해달라고 부탁한다. 또한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사다 키우게 한다. 거절할 줄 알았던 이가 인규의 친구로 남게 된 것이나, 당연히 죽을 줄 알았던 병아리 중 살아남은 한 마리가 계란을 낳아주는 결말은 참 따뜻하다. 죽음을 앞둔 애순은 “한날한시에 죽게 해 달라”는 기도 대신 목사에게 다른 부탁을 한다. 인규에게 죽음 이후에 대한 ‘구라’를 풀어달라는 것이다. 애순이 인규에게 남긴 것은 자활의 능력과 좋은 이웃과 엄마가 항상 언제나 지켜본다는 믿음이다.
영화는 평생 ‘품 안의 자식’으로 키웠던 인규를 독립시키기 위한 애순의 분투를 보여줄 뿐, 슬픔을 애써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압축된 자활 과정을 통해 보편적인 부모-자식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삶을 정리할 것인지, 자식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지, 가족을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지를 이보다 뚜렷하게 알려주는 영화도 드물 것이다. 웃는 얼굴로 엄마를 보낸 인규가 씩씩하게 일어나 계란 프라이를 해 먹고 사람들과 함께 등산을 가는 장면은 만면에 미소를 띠게 한다. 더 많은 장애인에게 더 많은 자활이 필요하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대중문화 평론가. 2002년에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데뷔한 후, 각종 매체에 영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싣고 있다. 여성, 장애, 노동, 인권, 민주주의, 역사 등에 관심이 많다.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조직위원, 여성인권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chingmee@hanmail.net
2019년 10월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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