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모두가 잠든 늦은 밤, 때로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긴 시간 그림을 그렸던 이가 있다. “똑같은 거 계속 그리면 안 된다고, 똑같은 거 자꾸 그리면 보기 싫다고 해서”(주1)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에 온전히 혼자가 되어 그림을 그렸던 이. 바로 정종필 작가의 이야기다.
정종필 작가는 최근 개인전 《가지런한 이야기》에서 2004년부터 무려 20년간 ‘온전히 홀로’ 그려온 드로잉 300여 점을 공개한 바 있다. 오랜 시간 주변 사람들에 의해 예술작품이라고 여겨지지 않아 버려지거나 방치되거나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가장 좋아하는 작업이라 하루도 빠짐없이 지속해 온 단색의 드로잉들.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세하고도 다채로운 변주와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그만의 발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창작 세계에 대해 정종필 작가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정 작가의 경우 ‘언어’를 통한 소통보다 ‘그림’을 통한 소통이 좀 더 활발할 수 있기에 주로 그의 드로잉을 매개로 대화를 나눴다. 그의 대답은 대체로 단답형이지만 짧고 단순한 말 속에 그의 ‘진짜’ 생각과 느낌이 들어있다. 특히 발달장애를 가진 작가의 창작 세계를 소개하는 경우 제삼자의 특정 의견이나 방향성이 함부로 개입되지 않은, 작가의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하기에, 가독성을 위한 편집 과정만을 거쳐 그의 대답을 실었다.
김효나 뉴스룸 아나운서, 여배우 얼굴, 자동차, 결혼식 장면 등 어린 시절 특별한 인상으로 각인된 이미지를 A4용지에 주로 모나미 볼펜만을 사용하여 반복적으로 그리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최근 몰두하고 있는 작업은 무엇인가요?
정종필 자동차 그리고 있어요. (하나하나 천천히) 버스, 기차, 탑차, 트럭, 포크레인, 지게차, 레미콘이요.
김효나 다양한 차를 그리고 있군요. 최근 열렸던 개인전에서도 방대한 양의 자동차 드로잉을 볼 수 있었는데, 주로 버스가 대부분이었어요. 작품 정보를 보니 2007년부터 무려 17년간 버스를 그려왔는데, 버스를 그리는 이유나 계기는 무엇인가요?
정종필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버스가 좋아서요.
김효나 어렸을 때 버스를 자주 탔어요?
정종필 이모할머니네 집 갈 때 엄마랑 자주 탔어요. (사이) 지금도 자주 타요.
김효나 버스 타면 무얼 하나요?
정종필 버스 구경해요.
김효나 버스를 타고도 버스를 구경한다고요?! 또 뭘 구경하나요?
정종필 (다시 하나하나 천천히) 자동차, 지게차, 탑차, 트럭, 레미콘….
자신이 즐겨 관찰하는 자동차의 종류를 차분히 나열하는 정종필 작가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의 언어적 발화 방식이 이미지를 배열하는 방식과 몹시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개최했던 개인전의 제목 《가지런한 이야기》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마치 단어를 배열하듯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지런히 배열하는 특성이 있는데, 그러한 배열 방식 안에서도 여러 가지 변주가 이루어지고 있기에 이에 대해 질문해 보았다.
김효나 (두 종류의 서로 다른 드로잉을 펼쳐 보이며) 어떤 버스들은 네모 칸 안에 들어간 채로 배열되어 있고, 또 어떤 버스들은 칸이나 다른 구분선 없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데, 왜 그런 걸까요?
정종필 주차장에 있어서요.
김효나 아아, 네모 칸 안에 있는 버스들은 주차장에 있는 거예요? 어떤 주차장이요?
정종필 외할머니네 집 주차장.
김효나 그럼 네모 칸 없이 늘어선 버스들은요?
정종필 달리고 있는 거예요.
김효나 어디를요?
정종필 할아버지 사는 동네.
옆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작가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버스 드로잉이 그러한 실제 배경을 가진 줄 몰랐다고 했다. 특히 거창에 있는 외할머니의 집 아파트 주차장은 마치 버스 주차장처럼 유난히 넓은데, 그곳을 유심히 기억하여 그림에 담아내고 있는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효나 (네모 칸이 그려진 버스 드로잉을 가리키며) 이곳이 특별히 외할머니 집 주차장인 이유가 뭘까요? 왜 외할머니네 주차장을 그렸어요?
정종필 외할머니가 좋아서요.
김효나 (또 다른 버스 드로잉을 가리키며) 그럼, 이 그림 속 버스는 어디를 달리고 있어요?
정종필 방화동이요. 초등학교 때 살았던 동네.
김효나 (또 다른 버스 드로잉을 가리키며) 이 버스는요?
정종필 외할머니 동네.
자신이 자주 갔고, 좋아했고, 또 오랫동안 살았던 실제 동네를 버스 드로잉의 배경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게 되니, 지난 17년 동안 그려진 수천 장의 드로잉 속에 담긴 그의 마음이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다가왔다. 정종필 작가의 드로잉을 볼 때 흔히 재현된 대상의 모양이나 세밀한 묘사, 단정하면서도 꼼꼼한 선 등 시각적 요소 그 자체에만 주목하게 되는데, 작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만이 소중히 간직하는 의미와 기억이 그림 속에 한결같이 들어있고, 그것도 생각보다 많은 기억과 애정이 들어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김효나 (또 다른 버스 드로잉을 가리키며) 이 그림에는 독특하게 문장이 쓰여 있네요. “복 잡 한 도 심 속 을 더 욱 편 안 하 고 안 전 하 게 달 린 다.” “보 다 안 전 하 고 쾌 적 한 대 중 교 통 문 화 를 선 도 한 다.” 이건 누구에게 하는 말이에요?
정종필 (곰곰 생각하다가 천천히) 향미 누나, 남동생, 외삼촌, 외숙모, 할아버지, 할머니, 큰할머니, 큰아빠….
김효나 또 있어요?
정종필 재필이 형님, 형필이 형님, 형수님, 현진이, 호진이, 소미.
묻지 않았다면 발화되지 않았을 이름들, 주변 사람들에 대한 그의 커다란 애정과 관심. 이는 그가 또한 오랜 시간 지속하고 있는 ‘결혼식’ 드로잉 시리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김효나 결혼식 드로잉은 2004년부터 무려 20년간 그리고 있군요. 주로 결혼하는 남녀의 모습이 좌측 상단에 배치되고 그 아래로는 무수한 사물, 동식물, 먹을 것 등이 오밀조밀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는 구성인데, 이 결혼하는 남녀는 아는 사람인가요?
정종필 스물한 살 아버지, 어머니예요.
김효나 종필 작가가 태어나기도 전의 부모님 모습이네요! 그럼 결혼하는 아버지, 어머니와 그 아래 사물들과는 무슨 관계인가요?
정종필 신랑신부 결혼을 축하해주는 거예요.
김효나 아, 선물 같은 것이군요! (사물 중 하나를 가리키며) 이건 무엇인가요?
정종필 칫솔이에요. 양치 깨끗이 하라고요.
김효나 이건요?
정종필 카드예요. 돈 많이 벌라고요.
김효나 이건요?
정종필 하프예요. 음악 공원에서 봤어요.
그 외에도 수족관에서 봤던 붕어, 제주도에서 봤던 판다, 길에서 봤던 개미, 오래전 눈썰매장에서 탔던 썰매, 서울대공원에서 봤던 얼룩말, 아버지가 좋아하는 수박, 어머니가 좋아하는 키위, 경상도 할머니네 집 대문, 아버지의 가방, 아버지의 담배 등. 어느 하나 기억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저 무수한 사물의 나열이라고 보았던 이 드로잉은 실은 무수한 기억의 나열이었던 것이다. 옆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작가의 어머니도 다시 한번 깜짝 놀라며 그 많은 것들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가 보고, 만지고, 만나고, 경험했던 대상들이 이 결혼식 그림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줄은 몰랐고, 오늘 인터뷰를 지켜보면서 또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정종필 작가의 어머니 신필자 님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반복적인 단색의 드로잉을 ‘장애의 증상’이라고 여겨 창작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작가의 가장 든든한 창작 매개자로 역할을 하고 계신다. 최근 개인전 《가지런한 이야기》에서 그의 A4 용지 드로잉 300여 점을 공개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체계적으로, 그리고 소중히 작품을 아카이빙해 왔던 덕분이다.
***
인터뷰를 위해 정종필 작가와 함께 그의 드로잉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들여다보면서,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하나 발견했다. 바로 결혼식 드로잉의 무수한 사물 속에 숨어있는 ‘눈’이었다. 그림 하단에 너무 자그맣게 그려져 있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하나의 ‘눈’. 배가 불룩한 말과 허리가 긴 하마와 혹이 산처럼 뾰족한 낙타와 초록 머리 앵무새와 무표정한 표범과 혀를 내밀고 있는 강아지 사이에, 새끼손톱보다도 자그마한 크기의 눈 하나가 정면의 무언가를 면밀히 관찰하는 듯이 커다랗게 뜨고 있었고,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정종필 작가의 눈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분명 정종필 작가의 눈이라고 확신했다. 커다랗고 맑은 동공과 길고 짙은 속눈썹과 대상을 향한 분명한 방향성을 가진, 정종필 작가만의 고유한 시선. 다른 수백 장의 드로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이 한 장의 드로잉 속에 숨은 그림처럼 그려진 자그맣고도 커다란 눈을 나도 모르게 한동안 가만히 마주하였고, 그러고 있자니 문득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다 보고 있어요. 그리고 다 기억하고 있어요.’
정종필
버스, 결혼식, 뉴스룸 아나운서, 여성 인물 등 자신에게 특별한 인상으로 각인된 소재나 인물을 마치 일기를 쓰듯 하루도 빠짐없이 그린다. A4용지에 모나미 볼펜으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에 온전히 홀로 그려온 드로잉 300여 점을 《가지런한 이야기》(2024)에서 공개했다. 그 외에 개인전 《마음으로 전하는 소박한 전시회》(2017), 그룹전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2021) 등에 참여했다. 밝은방에서 창작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김효나
소설가, 밝은방 공동대표. 병이나 장애의 증상으로 인식되어 버려지고 금지되는 창작물과 그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2008년부터 발달장애를 가진 창작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등 다수의 전시와 출판물을 기획하였고, 개인 작품으로 출간된 책으로는 『2인용 독백』, 『초와 그녀』 등이 있다.
enter2h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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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재범 라무팜스튜디오 실장 andy45a@naver.com
자료사진.밝은방
2024년 9월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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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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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나 작가님이 발견하신 그 ‘눈’을 보고 싶어 몇 번이나 그림을 확대해보고 표범과 말, 강아지 사이를 눈으로 바삐 오고갔지만 저는 결국 찾지를 못했어요. 무한히 반복되는 것 같은 그림 속에 매일 다른 하루의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고 생각하니, 저도 더욱 가지런한 마음가짐으로 그림을 보고 싶어지네요. 수천 장의 그림과 수만 개의 사물 속 단 하나의 눈은 아마 그 고요한 반짝임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보석이었나 봐요.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