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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장애인은 노동할 수 있는가?”
‘장애인도 노동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상당수조차 이 질문 앞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오늘날 노동은 보통 자본의 이윤 증식을 가능케 하는 활동, 특히 임금노동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적·사회적 조건상 ‘자본이 요구하는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이들, 고용 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상(?) 규율을 체화하지 못한 이들이 ‘노동할 수 없는 자’로 분류되는 건 이 시대에 너무 당연한 일이다. ‘장애’란 단어도 기원적으로 ‘임금노동을 할 수 없음(dis-ability)’을 뜻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 노동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개인이나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다. 여기서 ‘개인이나 사회에 필요한 가치’란 자본의 이윤 증식 과정에서만 생산되는 게 아니다. 그 사실이 좀처럼 상기되지 않는 건 단지 자본(자본가들)이 이 시대 노동 세계를 본인들의 목적에 맞게 구성해 두었기 때문일 뿐이다. 실제로 임금노동에 포함되지 않는 돌봄 노동, 재생산 노동, 어딘가에 고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지는 예술 활동 등은 GDP(국내총생산)에조차 포함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이 세계를 매 순간 새롭게 재창조한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쉽게 망각하게 되는 이 사실은 장애인 노동 문제를 고민하는 데 특히나 중요하다. 오늘날 사회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활동을 재고하는 과정에서는, 기존에 중증장애인이 수행해온 활동 혹은 향후 그들이 수행할 수 있는 활동 상당수의 의미가 재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기존 장애인 노동정책들이 이 점에 주목하기보다는 임금노동에 장애인의 몸을 편입시키는 데 집중해 왔다는 사실이다. 「장애인고용촉진법(현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시행 후 한국에서도 본격화된 직업재활 이념의 문제는 그것이 언제나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나아가 장애인 개인이 자신의 ‘비정상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면 결국 계속 무능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장애인은 이를 통해 임금노동 시장에 편입되어 기존보다 나은 삶을 꾸릴 수 있지만, 상당수 장애인, 특히 중증장애인은 이 정책을 통해 다시 한번 더 무능한 존재로 낙인찍히게 된다.
직업재활 정책 30년의 한계가 이미 곳곳에서 지적되고 있는 지금, 이제 필요한 것은 장애인 각자의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하면서 그들이 지금까지 참여해왔고 앞으로 참여할 활동을 중심으로 새로운 노동 세계를 준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쟁 노동시장 안으로의 편입이 아니라, 경쟁 노동 영역에 포함될 수 없는 노동을 사회적으로 재평가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에 단순히 ‘치료’나 ‘장애 극복’ 따위와 등치되어 온 장애인의 예술 활동이 이제는 새로운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술 활동의 본래 목적은 결코 이윤을 창출하는 데 있지 않다. 물론 독보적으로 뛰어난 예술가들도 있고, 오늘날에는 예술 활동조차 상당 부분 임금노동 체계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예술은 결코 어떠한 단일한 기준으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 예술 활동은 가치가 수치화된 실적에 따라 평가될 수 없으며, 활동 주체가 임금노동 시장에서 경험하는 방식과 동일한 경쟁을 요구받지도 않는다.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온 이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예술은 이미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해오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장애인의 예술 활동은 단일한 정상적 규율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이 세계를 더 다채롭게 재구성하고 있으며, 장애인 본인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생산 과정을 ‘즐기는 활동’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 세상이 ‘절대 노동할 수 없다’고 낙인찍은 최중증장애인에게 문화예술 일자리를 제공하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정식 명칭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가 장애계 안팎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주1) 이 일자리를 통해 그간 임금노동을 경험해 보지 못한 중증장애인 노동자들이 노래, 춤, 그림 등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세상에 표현하고 있다. 그 표현 하나하나는 뛰어난 능력을 갖출 것을 요구하거나, 어떠한 규정된 법칙도 강요받지 않아 더 자유롭다. 그리고 그 몸짓들이 지역사회 곳곳에 출현할 때, ‘이상한 존재’를 배제해 온 이 사회의 익숙한 풍경들이 하나하나 허물어지고 있다.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장애인 권리보장의 메시지와 함께, 이 세상이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으로 점차 변해가고 있다. 이러한 노동을 통해 장애인의 권리가, 아니 모두의 권리가 생산된다.
예술은 시장 논리에 단순 편입되는 순간 그 근본적인 취지를 상실한다. 즉 예술은 경쟁의 영역을 넘어 능력이 있건 없건 누구나 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정말로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활동을 노동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자리가 결국에는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정창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 노들장애학궁리소, 박종필추모사업회 등에서 활동한다. 장애인 노동과 장애인 운동사에 관한 고민을 통해, 장애 해방이 모두의 해방과 어떻게 맞닿을 수 있는지를 궁리하고 있다. 틈틈이 철학 공부를 이어가고 있으며,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한다.
m_sophist@naver.com
사진 제공.필자
2022년 10월 (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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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는 내용이고 많은 분들이 읽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