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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모두예술극장 기획 프로그램 〈어둠 속에, 풍경〉 일렁이는 봄, 움직이는 말

  • 장기영 공연예술비평가
  • 등록일 2024-07-24
  • 조회수 420

리뷰

인간의 감각이 ‘능력’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감각에 대한 인지가 비장애중심적으로 코드화될 때이다. 이때 감각동사(주1)의 사용은 감각이 능력으로 치환되어, 마치 이 단어의 사용을 ‘가질 수 있는/없는’ 것으로 구분하여 인식하게 한다. ‘보다(視)’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은유를 가졌던 단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장애를 의식하여 사용할 때의 ‘보다’는 능력적인 것으로 독해된다.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그룹(보이는 사람, 비시각장애인)과 그렇지 못한 그룹(보이지 않는 사람, 시각장애인)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말이다.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으로 이뤄진 ‘어풍탐’은 이 감각동사의 사용이 두 그룹 중 한 그룹만이 전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지점을 몸소 보여준다. 어풍탐은 ‘어둠 속 풍경 탐험가’의 줄임말이자 구예은, 기비안, 김기영, 김시락, 나무령, 박규민, 밝넝쿨, 신나라, 하지영, 황혜란 등 열 명의 퍼포머로 구성된 이 팀이 스스로에게 붙인 호칭이다. 이들은 화천 예술텃밭과 서울 모두예술극장을 오가며 2022년 리서치, 2023년 쇼케이스를 거쳐, 2024년 6월 〈어둠 속에, 풍경〉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올렸다. 보이는 이들, 보이지 않는 이들이 함께 ‘보다’를 말하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표현될 수 있을까. 나아가 이것은 어떻게 관객들에게 이해될 수 있을까. 3년간 어풍탐이 겪은 보기와 말하기는 감각에 대한 확장을 호출한다. ‘보기’를 뒤흔들고, 봄과 관련된 ‘말’을 비틀며 말이다.

아래는 6월 23일 오후 3시 공연에서 내가 감지한 감각들의 ‘술렁임’에 대한 조촐한 기록이다.

움직이는 ‘보기’

〈어둠 속에, 풍경〉에서 전시와 공연은 넘실거리며 서로의 경계를 넘본다. 어풍탐은 전시의 물성을 차용하며 관람 행위를 시각 너머의 것으로까지 확장한다. 온통 까만 극장 내부에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경계를 허물고 세워진 원통형의 기둥 세 개에는 ‘꿈 주석’, ‘소리 그림’, ‘언어 조각’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고, 각각의 제목과 연관된 다양한 이미지와 텍스트가 전시되고 있다.

먼저, ‘꿈 주석’ 기둥에는 퍼포머들이 그간 함께 나누었던 꿈에서 비롯된 낱말들과, 이에 새로이 부여된 의미가 문자와 점자로 적혀 있다. 점자를 읽을 수 없는 이는 읽을 수 있는 이에게, 문자를 읽을 수 없는 이는 읽을 수 있는 이에게 ‘읽기를 요청’할 수 있다. 각자에게 익숙한 텍스트 해독을 매개 삼아 서로 간 읽기를 교환할 수 있도록 기획된 것이다. 실제로 나는 점자를 읽을 수 있는 퍼포머 하지영에게 몇 가지 점자 주석에 대한 해석을 요청하였다. 하지영은 점자를 읽어주고, 그 말뜻까지도 설명해 주었다. 기둥에 적힌 주석의 내용 또한 흥미롭다. 예를 들어 ‘뽀득뽀득’과 ‘정반대’라는 낱말의 주석은 아래와 같다.

뽀득뽀득: 매끈한 표면을 청결하게 닦으면 악기처럼 소리가 난다. 뽀득빠득뿌드득빠다닥. 양치를 개운하게 하고 혀끝으로 이빨을 훑으면 누구나 뽀득 연주가 가능하다.

정반대: 무엇을 상상하든 정반대를 상상할 수 있다. 우주의 궁극적 원리가 대칭이기 때문이다. ‘몸’의 정반대를 상상해 보라. 그것은 ‘죽음’ 혹은 ‘정동하지 않음’이다.

이 주석들은 낱말을 풀이해줌과 동시에 풀이할 수 없게 만든다. 즉 여기서의 주석은 각 낱말에 대하여 어풍탐이 공유해온 이미지를 언어화했다는 점에서 풀어 쓴 것이지만, 이 설명은 보편적인 설명 문법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풀어 쓰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즉 이들의 풀이는 기존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해설하는 대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식으로 존재했다. 이들이 수행한 ‘풀이’와 그 메커니즘은, 언어에 들러붙은 여러 위계에 균열을 낸다. 이를테면 점자와 문자가 동등하게 교환 가능할 수 있다는 상상, 혹은 각 언어의 차이가 왜 동등한(일대일의) 교환으로서 균질적인 번역의 상태로 수렴될 수 있다고 여겨왔는가 하는 질문을 생성케 한다. 또한 이미 자의적인 기표와 기의 사이를 ‘적용/오용’ 등으로 묶어둘 수 없다는 점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에 따라 기의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생성되고 변형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떠올려지며, 둘 사이를 측정하고 식별하는 일은 언어 사용의 풍성한 실재를 한정할 수 없음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소리 그림’ 기둥에는 몇 점의 그림과 헤드폰이 걸려 있다. 이 그림은 선명한 색이나 선 대신 모호한 색채와 형상으로 이뤄져 있고, 무엇보다 이 그림은 만지면서 볼 수 있다. 아니, 정확히는 만져야 그림과 관련된 소리가 재생된다. 어느 부분을 만지느냐에 따라 녹음된 말이 다르게 재생된다. 여기서 그림은 보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 그림들은 보고-만지고-듣는 것이 되고, 이 동시감각적인 행위는 형상을 심상으로 이어지게 한다. 그림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동시감각적 행위를 촉발하여 관객 개개인이 각자의 상을 형성해 가도록 안내한다.

마지막 ‘언어 조각’ 기둥에는 음각의 선이 새겨지거나, 양각의 선이 덧붙여진 석고판이 전시되었다. 어풍탐은 작업 기간 동안 감각형용사(부드럽다, 뻑뻑하다, 포슬포슬하다 등)를 발화하는 대신 행위 혹은 촉각의 것으로 치환하였고, 이 공연에서는 그것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번역하였다. 이 선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알 만한’ 사물 혹은 존재로 정확하게 일대일 대응할 수 없게 만든다. 출발어와 도착어의 위계를 의심하는 번역이다. 이 이미지들은 그 무엇도 명확하게 지시하지 않음으로써, 언어의 지시적 능력을 의심하게 한다.

이 공연은 감각이란 것이 하나로만, 곧 단독으로 분리되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복하여 주지시킨다. 전술한 바와 같이 관객에게 ‘봄’으로만 끝나지 않는 봄의 수행을 종용하기도 했지만, 나아가 ‘소리’라는 것이 더 다채롭게 존재하며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소리는 촉각적인 것으로 변환되기도 하고, 시각으로만 파악 가능할 것 같은 것들을 청각으로도 감지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이다. 가령, 세 개의 기둥 중 가운데 기둥이 치워진 자리에 퍼포머와 관객이 함께 겹겹의 원을 이루며 모여 앉았을 때, 한 퍼포머는 옆에 앉은 사람들끼리 서로 손을 잡고 ‘아~’라는 소리를 내자고 권한다. 여기 모여 앉은 ‘우리’가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를 소리를 통해 가늠할 수 있도록 말이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곳에서는 이제 보지 않아도 ‘우리’라는 단위가 얼마만큼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인식할 수 있다. 이렇듯 어풍탐이 열어젖힌 감각의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실제 사용하고 있는 감각동사들이 실은 풍부한 메타포를 가져도 된다는, 이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움직이는’ 말하기

관객 개개인의 기둥 탐색 시간이 끝난 후에는 퍼포머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여기서 이들이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꿈’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보다’를 비시각장애인만의 감각동사로 전유하지 않기 위하여 이들이 함께 머문 이야기 자리는 꿈이었다. 꿈을 말할 때의 ‘보다’라는 술어는 시각 체험과는 무관해져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풍탐은 돌아가며 자신이 꿈에서 본 것을 상세히 묘사했다. 이 묘사는 말이 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이자, 시각 경험과는 무관한 이미지들이 생성되는 장소였다. 퍼포머들의 꿈 이야기는 각각의 것으로 조각나 있었고, 각자의 꿈 이야기조차도 서사적 맥락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이야기 조각들은 내용에 대한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다. 퍼포머들의 꿈에는 여러 인간 동물, 비인간 동물, 사물 등 다양한 존재가 등장했고, 이 존재들이 그 꿈에서 무슨 일을 행했는지를 핍진성에 얽매이지 않고 서술되었다.

여기서 잠시, 선천적 전맹이었다는 구예은의 꿈 이야기와 그에 맺힌 질문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구예은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할 때 ‘초록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때 비시각장애인들에게서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 한 퍼포머는 “본 적 없는” 색깔을 어떻게 지칭하며 사용하는 것인지 묻는다. 또 다른 관객은 구예은이 사용한 초록색이라는 표현이 “비시각장애인을 배려한” 표현이냐 묻는다. 구예은은 “그런 디테일한 배려까지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비시각장애인 중심으로 과도하게 해석할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 문답은 감각에 얽힌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적 코드가 재현되는 대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장면으로 읽힐 수 있다. 앞서 첫 단락에서 ‘보다’ 등의 감각동사가 비장애중심적 코드로 읽힐 때, 감각은 능력 보유 여부의 것으로 변환되어 마치 그 사용자에 따라 ‘가질 수 있는/없는’ 단어로 구분하여 인식하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구예은의 초록’ 즉 보이지 않는 이의 색 표현에 대한 비시각장애인의 반응은, 이 코드화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하여 알 수 있다. 그곳을 가봤거나 알고 있는 이들이 그곳에 대하여 설명하고 묘사한 언어를 누적하여 읽는다면, 그곳은 내게 그 언어가 지시한 대로 의미 지어진다. 가본 적 없음에도 그곳을 알고 있다는 감각은 이렇게 탄생할 수 있다. 적절한 예시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알거나 감각한다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이렇게 “학습된” 것인 경우가 적잖을 것이라는 점은 다시금 상기되어야 한다. 특히 이 공연에서는 감각과 관련한 여러 언어적 표현들이 ‘경험적 감각’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학습’에 의하여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언급한다.

‘초록’은 보이는 사람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색에 대한 식별과 그 표현은 시각을 경험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누적된 학습에 의해서도 구성되고 사용될 수 있다. 색채, 모양 등 시각적인 것으로만 읽힐 수 있다고 여겨온 특성들에 대한 재고이다. 초록을 안다/본다/말한다는 것이 곧 무엇이 얼마나 초록인지를 식별하는 능력 그 자체로만 귀결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시각장애인은 시각장애인을 향해 초록이 어떻게 사용 가능하냐고 묻는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초록스러운 것들’, ‘초록인 것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초록을 함께 들어왔고 함께 말해왔기 때문이다. 초록은 보여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덮어버리지 않는 덧칠

마지막에 이르러 퍼포머들은 앞선 것들을 완전히 ‘덮어버리지 않는 덧칠’을 실행한다. 퍼포머들은 한 기둥을 두른 커다란 캔버스에 목탄, 분필, 물감, 붓 등 갖가지 채색 도구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고, 동시에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은 자신의 행동을 동시적으로 지시하거나, 자신이 그리려는 그림을 서둘러 가리키거나, 혹은 아예 그 행위와 전혀 상관없는 어떤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그리곤 이내 흰 물감으로 앞서 그려진 채색을 뒤덮는다. 그러나 흰 물감은 반투명했고, 이들이 앞서 그려온 그림들은 말끔하게 뒤덮이지 않는다.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그림과 ‘정확히 지시되지 않는’ 말들 속에서, 이들이 ‘바라본’ 풍경이자 ‘그려온’ 풍경의 전말이 드러난다.

“보인다고 실재하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부재하는 것도 아니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이 존재한다. 꿈은 무의식이라는 어둠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의 향연이다. 온갖 정보, 상상, 믿음, 경험이 만나고 뒤섞이고 변화한다. 각자가 가장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어둠 속 풍경이다. 어둠의 색이라 흔히 믿는 검은색은 척박한 색이라 여기기 쉽지만 사실 가장 많은 빛을 간직한 충만한 색이다. 내가 경험한 〈어둠 속에, 풍경〉도 우리들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어둠은 고요한 외침이자 새하얀 광야이다.”(공연 중 김시락의 마지막 대사)

무언가를 완전히 덮어버리거나 벗겨내는 혹은 벗겨낼 수 있다고 믿는 일은 그를 표피로만 남게 한다. 어풍탐은 도리어 그 얕은 시야 한 꺼풀을 벗겨낸다. 보이지 않았던 그러나 지워진 적 없던 어느 풍경이 드러난다. 보이는 그대로만 존재하지 않는, 봄을 넘어야 보이는, ‘어둠 속에, 풍경’이다.

주1.‘보다, 듣다’ 등은 ‘지각동사(perception verb)’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는 ‘감각동사(sensory verb)’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동사들이 특히 비장애중심주의적 관점에서의 신체 손상 사실 자체에 집중했던, 즉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을 지각에 선행한다고 여김으로써 ‘감각 경험’의 여부를 ‘능력’으로 식별해 사용하였던 용례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 광장에서 우비를 입은 두 사람이 휠체어가 그려진 커다란 패널을 붙들고 서 있다.

    하지영 퍼포머가 ‘꿈 주석’ 기둥에 점자로 쓰여 있는 낱말을 읽어주고 있다.

  • 한 아이가 밝은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서 있다. 그 뒤로 여러 장비가 놓인 선반이 있다.

    관람객이 ‘언어 조각’ 기둥에 붙어 있는 음각 또는 양각의 석고판을 손으로 만져보고 있다.

  • (좌) 한 아이가 자기 가슴 앞에 든 그림판을 손으로 짚고 있다. (우) ‘How To Be’라고 제목을 쓴 그림판. 9개의 칸에 손, 머리, 팔, 다리, 발바닥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기둥을 바깥으로 밀쳐놓은 자리 원형 공간에 두 명의 퍼포머가 서 있고, 관객이 그들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다.

  • 축제 공간을 표시한 지도에 주차장, 휠체어 대여, 의료지원, 수유실 등의 표시가 있다.

    퍼포머들이 커다란 캔버스가 된 기둥에 둘러서서 그림을 그리거나 지우고 있다.

어둠 속에, 풍경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궁리소묻다|2024.6.20.~6.23.|모두예술극장

서로 다른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어떤 모양일까? 2022년 리서치, 2023년 쇼케이스를 거쳐 2024년까지, 지난 3년간의 어둠 속 풍경 탐험의 기록을 담았다. 눈이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 예술가와 비예술가가 모여 보는 감각 너머의 세계를 함께 탐구하고 그 경험들을 나누는 작업을 했다. 어둠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몸을 만나고, 그 몸의 만남을 통해서 각자의 몸을 더 알게 되고, 꿈을 나누고, 꿈을 언어화하고, 그 언어의 속뜻을 발굴하는 작업을 통해서 서로의 세계를 공유했다. 개개인의 세계가 중첩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그 세계 안에서 각자의 다름을 다시 한번 발견한 시간, 몸의 모든 감각을 활짝 열고 어둠 속에서 탐험한 풍경을 관객과 나눈다.

- 이음온라인 [문화소식]

장기영

읽고 쓴다. 공연·영화·소설·시 등을 보고, ‘봄’을 ‘읽음’으로 꿰어, 이내 ‘씀’으로까지 전개시킨다. 이 행위가 평론 혹은 연구라고는 불리지만, 실은 ‘보고 읽고 쓰는 사람’으로 불릴 때가 제일 마음 편하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에서 학생들에게 쓰고-읽고-말하고-듣기를 가르치고 있다. 최근에는 장애예술에 대한 고민을 토대로 국내외 공연작품 리뷰를 엮은 책 『보란듯한 몸, 초과되는 말들: 배리어컨셔스 공연』(책공장이안재, 2023)을 썼다.
kalce7@naver.com

사진 제공.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사진 ⓒ옥상훈)

2024년 8월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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